[제주4.3] #7. …그래도, 삶은 오래 지속된다.

7. 마치며 : …그래도, 삶은 오래 지속된다.

4.3 사건 시기 이뤄졌던 집단 학살은 제주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죽었다고 해도, 죽였다고 해도, 죽은 자의 옆에 있었다고 해도, 죽은 자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도, 사건을 피해 일본이나 광주로 도망가 있었다고 해도. 사람들은 지금도 그때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그랬다더라-는 증언을 해도 자신이 어땠는지 이야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지금도 많은 이들은 그때의 이야기만 해도 혼절하거나, 그저 소리 높여 울거나, 하늘만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실재와의 만남은 그만큼 잔인하다. 그것은 우리가 평범한 정신으로 버텨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말로 대신해 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피에르 레비가 생존자는 가짜 증인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실재와 맞부딪힌 사람은 결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것은 죽거나 겨우 견뎌낼 수 있는 어떤 것일 뿐이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실재와 맞부딪힌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말하지 말라는, 말할 수 없는 사람을 대신해서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 말라는.

다만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자는 이제 꿈이 되어, 다른 사람을 통해 전달된 말이 되어 다시 돌아온다. 그것은 또다른 환상이다. 하지만 환상만이 실재에서 우리를 보호한다.

“하날님이여, 내가 오늘 죽게 된 줄 알 거라면 왜 밤 꿈에 보이지 못하였습니까. 복수야 (아내의 이름)–이날 내가 죽은 후에 아이를 한 가지로 과오가 변함없이 잘 길러서 대한민국에 충성하도록 하여 달라…윤부야 (아들 이름) 너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 제민일보사, <4․3은 말한다> 4권, 1997, p108


“나중에 죽은 후에 소문을 들으니까, 강기봉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 사람은 살아서 석방됐어요. 그 사람이 석방되고 날 만나서 이야기를 해주더라고. 당신네 신랑은 어떤 날 어떤 곳에서 자기하고 같이 있다가 죽었다고. 그래서 우리집에서 신랑이 팔월 몇 일에 죽은 걸 확실히 알게됐어요. 그리고 나한테 이렇게 전하라고 했더라구요. …. 자식들 서너명 있으니까 그 자식들 잘 기르고 잘 살라고 했데요. … 나 이제야 눈물도 나는 거지, 신랑 죽고 자식 죽어도 안 울어본 사람이에요. 죽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일이었어요. 너무 충격이 커서 … 살 생각만 났지 죽을 생각 울 생각 안 났어요.”

– 강도화, 여, 1923년생, 2003년 제주대 강의에서의 증언


학살의 광풍이 잠잠해진 2년 뒤 안씨는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꿈에 자꾸 동서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안씨의 조카의 몸에 실린 영혼은 ‘배를 갈라 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했다. ‘아기가 다리 사이에 걸려 있어 걸을 수 없고, 저승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영혼은 또 생전에 ‘오라방’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사람이 자기를 죽였다며 몸부림쳤다. 굿을 치른 뒤 안씨는 동서의 시신을 지금의 무덤 자리로 옮겨 제대로 수습해 주었다. 핏덩이 아기도 시신에서 분리하여 곁에 묻어 주었다.

– 시사저널 1998.4.9 “탐라섬 ‘4월의 비극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작은 형수가 지금도 꿈에 나타나. 꿈에 나타나면 항상 고생한다 그러지, 잘살라고 하고, 언젠가는 행복한 날이 온다고도 하고, 내 가까이도 안 와, 어떤 때는 저 멀리 서서, 꼭 처녀 때 모습으로, 무명 흰저고리 검정치마 입고, 머리도 그대로….

– 제주 4.3연구소, 『무덤에서 살아나온 4.3 수형자들』, 역사비평사, 2002, p107

죽은 자의 말이 되어, 유서가 되어, 꿈이 되어 우리에게 하는 말은 하나다. 살아라, 살아라, 살아라- 어떤 일이 있어도 살라는 정언 명령. 그 모든 것은 결국 이제 존재하지 않는 타자가 나에게 하는 명령, 또는 자기 스스로 자신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살아라, 살아라, 살아라.

그걸 제주도말로 하면 “살암시민 살아진다”라고 한다. 수많은 생존자들의 증언 속에 꼭 나오는 말, “그래도 살암시난 살아지더라”라는 말. 밤에 몰래 맷돌을 갈면서, 노래 부르는 척 먼저 떠난 손주의 이름을 부르던 할머니도, 열다섯군데 총알을 맞고 반병신이 됐던 할머니도,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르는 채 육지 감옥에서 십수년을 썩었던 할아버지도, 똑똑한 사람들은 모두 죽어버리고 우리 같이 못난 것들만 남았다고 탓하던 할머니도, 모두, 살았다.

탓하기 이전에 우선 살았다. 살고 살고 또 살았다. 어떤 도움이나 희망도 바라지 않고, 그저 막연하니 살아있으면 살아있게 된다고 말하며 살았다. 다 죽고 불살라진 폐허 속에서도 살았다. 어떤 경우에라도, 어떤 혼란 속에서라도 사람은 자신의 일상을 유지할 수 있다면 살아갈 수 있다. 일상을 유지하는 척이라도 한다면 살아갈 수 있다.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항상 꿈을 꾼다. 그래도 나만은, 그래도 이번만은 어떻게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살 수 있지 않을까-하는 환상을. 그것을 빅터 프랭클은 사형수가 가지는 ‘집행유예의 환상’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정말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은 환상이 아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진정한 욕망은 살려는 욕망이다. 죽은 자의, 죽은 말을, 죽은 사람의 꿈을 통해 스스로에게 내리는 정언 명령. 살려는 욕망에 충실한, 살라는 명령을 초자아의 명령이 아닌 욕망의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열두 개피의 담배로 열두 그릇의 수프와 바꾸어 먹을 수 있고, 열두 그릇의 수프는 종종 굶주림을 한동안 면하게 해준다는 사실이었다. … 삶에 대한 의지를 상실하고 최후의 며칠간만이라도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만이 담배를 피웠다. 따라서 동료인 죄수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게 되면 우리는 곧 그가 버티고 나갈 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일단 믿음을 상실하게 되면 살고자 하는 의지는 좀처럼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 빅터 프랭클, 김충선 옮김,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출판사, 2002, p27

그렇다면 서북청년단은 그후 어떻게 됐을까? 당연히 어떤 사람은 죽었고, 제주도에 내려온 일부는 결혼하여 제주도 사람이 되었고, 제주도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일부는 경찰이 되었고 누군가는 군대에 들어갔고 어떤 이는 교도관이 되었다. 그들 역시 전쟁 중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 6.25 전쟁중 많은 전사자를 냈던 백골부대가 바로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이북지역 출신들의 집단 입대로 만들어진 부대였다. 역사적으로 따지자면, 그들은 나중에 이승만에게 버림받았다. 강제로 해체된 서청은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다가, 지금은 한국청년운동협의회를 거쳐 유명무실한 조직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지나간 사람들이 삶 속에서 남겨준 것을 마지막으로 읽는다. 물론 “과거의 희생자는 결코 잊혀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정치적으로 미화되어서도 곤란하다. 필요한 것은 그들의 죽음과 고통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런 정신분석의 끝에서 도달하는 결론,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고, 우리가 우리라는 것을 증명해 줄 아무 것도 없다는 윤리적인 문제에 대한 하나의 답을 찾기 위함이다.

형님은 보니까 갈빗대도 엉성해불고, 눈만 떴지 말도 잘 못하고 손만 영 흔들고 죽은 사람이라. 식사는 하루에 한 번 보리주먹밥, 콩을 섞은 것도 같고 안 섞은 것도 같고, 하루 한 끼를 주는데, 그걸 먹지 않고 옆 사람에게 ‘우리 동생한테 갖다주라’고 하는 거라. 그걸 내가 먹을 수가 없더라고.
 
– 제주 4.3연구소, 『무덤에서 살아나온 4.3 수형자들』, 역사비평사, 2002, p98


살아오면서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 벌써 50년이 넘은 이야기지만 인천형무소에서 나올 때 맨발로 나왔거든. 그래서 인천 주안역에 서 있으니까 지나가던 어떤 할머니가 신발이 없는 나를 보고 운동화를 갖다주더라고. 고무신도 아닌 운동화를. 어찌나 고마운지 지금까지도 잊혀지질 않아. 그 당시도 할머니였으니까 물론 지금은 살아 계실 리 만무하지만 지금이라도 만날 수 있으면 그 공덕을 꼭 갚고 싶어.

– 같은 책, p63


그러자 군인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송씨는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지만 군인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굴속에는 자기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다른 굴을 가리키라고 위협했지요. 그런데 그분은 용감하고 당찼습니다. ‘죽어도 혼자 죽겠다’며 버티더군요. 결국 그분만 불타버린 대흘국민학교 터로 끌려가 죽었습니다. 그분이 위험에 못이겨 밝혔다면 난 죽었을 겁니다. 또 우리가 있던 굴 외에도 인근의 많은 굴에 여러 사람들이 숨어 있었기 때문에 희생이 컸을 겁니다.

– 심도봉씨의 증언, <4․3은 말한다> 4권, 1997, p402


오래 전부터 그 분이 아버님의 죽음 현장에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형제 아무도 그 분에게 ‘왜 아버지를 죽였느냐. 무릎 끓고 사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신을 찾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분이 동네를 떠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버님의 장사를 지낸 3일 후에 술을 사 들고 그 분의 집엘 찾아갔죠. 저가 먼저 무릎을 꿇고 ‘당시에는 어쩔 수 없지 않았느냐. 삼촌이 잘못한 게 아니라 그 시대가 잘못됐다’고 말하면서 함께 마을에서 살자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 김두연, 4.3사건 유족회 회장의 증언, 제민일보 2005년 4월 5일



사람이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타인에게 받았다고 느끼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타인에게 줄 수가 있다. 톨스토이라면 그것을 ‘동정’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라깡이라면 그것을 ‘여성적 쥬이상스’라고 불렀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것을 측은지심이라 말하기도 하고, 용기라고 하기도 하고, 어쩔때는 가끔,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해야할 일을 아는 것, 지나친 행동에 맞서 올바름을 택하는 것,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거나, 알고 있지만 말을 할 수 없는 것. … 나 하나 살자고 당신을 죽일 수는 없다는 마음. 지켜야만 하는 타인에 대한 예의. 환상에 사로잡힌 광기에 맞서, 사람들은 그 작은 것들을 지키면서, 살아남았다.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던 땅에서, 살아갔다.

그것이야 말로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그것을 지켰기에, 버러지만도 못했던 우리를 결국 그 누구도 짓밟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제주도민들이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음으로, 인간이길 포기했던 이들에게 맞서 얻을 수 있었던 것.

그것은, 인간의 ‘위엄’이었다.

■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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