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래프(Siggraph)는 컴퓨터 그래픽과 인터랙티브 기술을 주로 다루는 국제 행사다. 컴퓨터 학회의 분과 행사로 1974년에 시작해서, 올해 45주년을 맞었다(SIG가 소모임을 뜻한다.). 세계 최고의 컴퓨터 그래픽 행사중 하나다.
이번 행사가 열린 장소는 캐나다 밴쿠버. 기간은 지난 8월 12일부터 16일까지. 올해는 한국을 비롯해 세계 87여개국에서 온 1만 6천 500여 명이 참가했다. 생각보다 규모가 작은 거 아니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CES 같은 ‘쇼’가 아니라 일종의 학술 대회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
대신 다른 IT 쇼와는 분명히 다른 두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컴퓨터 그래픽 분야의 장인들에게 어떤 장면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최신 기술을 직접 보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엔비디아와 VR, 시그래프 2018의 주인공
이번 시그라프 2018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엔비디아다. 이번 행사에서 새로운 그래픽 프로세서 아키텍처인 ‘튜링’과 튜링 GPU를 탑재한 쿼트로 RTX 그래픽 카드를 공개해서 눈길을 끌었다. 지난 파스칼 아키텍처 대비 6배의 성능을 자랑하고, 추가된 인공지능 칩의 도움으로 실시간 레이 트레이싱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3D 작업을 하는 아티스트는 두 손을 들고 환영했을 듯. 다만, 늘상 그렇듯, 돈이 문제긴 하지만….
관심은 엔비디아가 받았지만 메인 스트림은 ‘가상현실’이다. 2016년 시작된 트렌드가 시그라프에선 더 불이 붙었다. 눈길을 끌었던 관련 기기, 장비는 대부분 비지니스용으로 설계된 제품이다. VR 이 가정/개인에게 침투하는 것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VR 테마파크 등은 환영을 받으면서 생긴 변화다(VR 테마 파크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VR 게임은 예전 전자 오락실…처럼, 공공 오락실->가정용의 길을 밟게될 가능성이 높다.).
눈에 띄던 장비는 스타VR 원 헤드셋이다. 상업용 VR 제품인 스타VR 헤드셋을 개량한 버전으로, 시선 추적 기능이 장착되어 있고, 사람의 시야각을 모두 가릴 정도로 화면이 크다. 주위에 트래킹 시스템을 장착해 헤드셋 위치를 추적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사실, 헤드셋 하나만 따로 놓고 볼 수 없는 일종의 플랫폼이다.
모션 캡처 장비나 소프트웨어도 많이 출픔됐다. 오리진이라 불리는 제품은 적외선 LED를 이용한 위치 기반 모션 캡처 시스템이다. 16대 정도의 카메라로 2~3명을 동시에 인식할 수 있고, LED 를 사용하기에 빛에 간섭받지 않는다. 밝은 공공 장소에서도 이용하기 쉽다는 말이다.
가장 흥미롭게 여겼던 것은 아이키네마에서 내놓은 ‘데마크라타이징 모캡’이다. 아이폰X에 장착된 안면 인식 기능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얼굴 동작 및 이용자 모션을 캡처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가상 유튜버 같은 곳에도 이용할 수 있고, 상용화된다면 정말 간단하게 3D 영화를 만들 수도 있을 듯 하다. 시그라프 2018에서 ‘실시간 그래픽과 인터랙티브’ 부분 상을 수상했다.
오토포칼스와 딥 비디오 포트레이트
연구 발표된 과제 중에는 니어 아이 디스플레이라고 해서, 증강현실 안경에 대한 연구가 많이 선보였다. 하지만 가장 재미있던 것은 오토포칼스가 아니었을까. 자동으로 초점을 맞춰주는 안경이다. 노안이 든 사람에게 좋은 안경으로, 사람의 안구를 추적해서 자동으로 가까운 곳을 볼 때는 가까운 곳에, 먼 곳을 볼 때는 먼 곳에 초점을 맞춰준다.
다른 재미있는 연구라면 ‘딥 비디오 포트레이트’를 꼽겠다. 살아있는 인물을 연기할 수 있는 기술이라고 해야하나. 연기자가 어떤 표정을 지으면, 실제 인물 표정이 그에 맞춰서 움직인다. 표정뿐만 아니라 동작까지 따라할 수 있다. 궁금하면 아래 영상을 보자.
이 밖에 도쿄대에서 내놓은 미각 콘트롤러나 원격 협업 로봇팔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여러가지 의미로, 일본은 이런 쪽에선 진짜 천재적이다.
카이스트에서 만든 윈드 블래스터도 마찬가지.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디즈니가 만든 VR 애니, 사이클스
디즈니에서 만든 첫 번째 VR 애니메이션인 ‘사이클스(Cycles)’도 선보였다. 한 가족과 그들이 사는 집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보여줬다고 한다. 평가는 괜찮은 편이다.
HP에선 ‘HP 마스 홈 플래닛’ 영상을 시연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일종의 VR 화성 시뮬레이션으로, 지난 1년동안 ‘100만명이 화성에서 산다면 무엇이 필요할지’, 필요한 기기나 제품을 디자인해 달라고 공모했다. 그 결과로 나온 시스템을 채택한 것이 움직이는 화성을 보여주는 것이 이번 영상이었다.
이번 시그라프 컴퓨터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의 최우수작은 ‘하이브리드’가 차지했다. 인간이 버린 폐기물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생물, 살아있는 물고기를 쫓는 로봇 물고기를 보여준 조금 섬뜩한 작품이다. 가상 생물을 생생하게 표현해 낸 것이 매력적이었지만.
올해 시그래프를 뭐라 평가할 수 있을까? 아마 새로운 시대로 건너가기 위한 징검다리, 정도가 되지 않을까? 다른 해와 비교하면 유달리 하드웨어가 눈에 많이 띄인 행사였다. VR 영상은 상업용 기기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이를 지원하는 시스템도 많이 선보였다. 이에 맞춰 표준화도 진행되는 과정이다. 스케치팹의 메시브나 카오스 그룹의 브이 레이 클라우드 등 눈에 띄는 소프트웨어도 있었다. 다만, 늘상 나오는 얘기지만, 아직 킬러 콘텐츠가 없다. 내년 행사에선 보다 콘텐츠가 눈에 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