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시픽림, 한국형 예거 ‘태권V’에 대한 보고서

철컥. 슈트 위로 차가운 금속의 진동이 느껴진다. 철컥. 끼익하면서 몸이 앞으로 쏠린다. 다시 다음 발을 내딛는다. 오케이. 자세 제어 장치는 문제 없다. 이번엔 왼팔을 들어본다. 오른팔을 들어본다. 조금 무거운 감이 있긴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키링키링. 어딘가에서 심장 고동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 녀석, 여전히 살아있었구나. 왠지 가슴이 두근 거린다. 두 팔을 벌리며, 가슴의 흡입구를 모두 개방한다. 파호- 마치 호랑이가 고함을 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다. 치익- 태권V가 움직이자, 바로 무전이 날아온다.

“여기는 태권1, 태권V 들리는가?”
“여기는 태권V, 아주 잘 들린다.”
“지금 상태는 어떤가”
“아주 좋다. 8년전에 탔을 때보다 상태가 더 좋아진 것 같다”

태권V가 만들어진 계기는 2016년의 인천 궤멸 때문이었다. 처음 등장했던 2등급 카이주는 과학자들의 예측과는 달리 중국과 일본 사이의 한국을 향해 바로 치고 올라왔다. 인구 1천만이 넘는 메가 시티 서울 때문이었다. 카이주의 목표는 인류의 절멸. 그것을 목표로 하는 카이주에게 서울은 생각 이상의 먹잇감이었던 셈이다.

침략은 인천을 통해 이뤄졌다. 당시 서울은 도쿄 셰터돔의 관할 구역이었으나, 아직 기지는 공사중이었고 일본 예거들은 빠르게 전송될 수단을 갖고 있지 못했다. 공군과 해군이 전력을 다해 저항했으나 코요테 탱고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인천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도시로 변해 있었다. 가까스로 카이쥬의 서울 상륙을 막아낸 정부는, 독자적인 방어 체계 구축이 필요함을 느끼고 한국형 예거의 개발에 착수했다.

그리고 2017년, 한국형 예거 ‘태권’의 테스트가 시작됐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비정규 예거로, 공식 예거의 범주에 포함되진 않는다. 일단 크기가 너무 작았다. 20~30m 사이의 사이즈는 카이주의 주의를 끌 수 있는 최소 사이즈였지만, 기존에 제작된 예거 크기의 반도 되지 않았다. 이렇게 작아진 이유는 양산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따로 셰터돔을 만들지 않아도 기존의 군부대와 항만을 개수하는 것만으로도 수납 및 수리가 가능했고, 기존의 군수 시설을 이용해 생산, 조립하는 것도 가능했다.

작아진 대신 한국형 예거 태권-은 다른 전략을 추구했다. 바로 1개 분대형의 전술을 실행하는 것. 한마디로 예거 1 vs 카이주 1의 전술에서 벗어나 양산형 예거 다수가 카이주 한 체를 공략하는 전술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전체적인 생산/수리 코스트를 대폭 낮추면서도 점점 대형화되는 카이주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양산형 예거 태권은 총 5가지 형태로 구성되었다. 핵심은 전술지휘 기체인 태권Ⅰ에 있었다. 예거라기 보단 거대형 수륙양용탱크에 가까운 이 기체는, 카이쥬의 움직임을 감시하면서 전체 예거들에게 지휘를 내리는 기체였다. 이 기체가 양상형 예거 태권 시리즈의 실제 브레인이었는데, 이는 조종사의 뇌파를 태권Ⅰ의 AI와 무선으로 드래프트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파일럿의 뇌에 가해지는 부담을 줄여, 파일럿의 훈련과 육성이 보다 쉽게 가능해졌다.

태권Ⅱ와 태권Ⅲ은 중거리 지원을 맡는 기체였다. 빠르게 움직이는 카이쥬의 움직임을 최대한 묶고,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 목적으로 장거리 다연발 미사일을 장착하고 있었다. 근접전은 취약하기에 역설적으로 방어 장갑이 강화된 기체들이었다. 근접전은 태권Ⅳ와 태권Ⅴ가 맡았다. 다른 기체들보다 조금 큰 몸집의 이 기체들은, 카이쥬에 대한 미끼이자 실질적으로 카이쥬의 생명을 끊는 역할을 맡은 기체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태권Ⅴ는 조금 더 특이했다. 다른 1-4까지의 태권 시리즈가 양산을 목적으로 설계됐다면, 나머지 시리즈 기체들의 프로토 타입격인 태권Ⅴ는 당시 한국의 최신 기술을 모두 쏟아부은 시범 기체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태권 시리즈의 첫번째 실전은 부산 앞바다에서 일어났다. 상대는 등급 1의 작은 카이쥬였지만, 태권팀이 거둔 성과는 작은 것이 아니었다. 바록 태권Ⅳ가 전파되고 태권Ⅴ도 반파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지만, 작전 시간 20여분만에 부산의 피해 없이 카이쥬를 섬멸한 것이다. 양산형 예거가 실제로 카이쥬를 물리칠 수 있었다. 태권팀을 이끌었던 국방부와 과학자, 엔지니어, 파일럿들은 모두 생각 이상의 전과에 흥분되어 있었다.

하지만 흥분도 잠시. 위기가 닥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원자력 업계를 중심으로 양산형 예거에 대한 불안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원자력 업계는 카이쥬의 등장이 신의 축복이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기점으로 쇠락해가고 있던 원자력 산업이, 예거에 핵반응로가 장착된 것을 기반으로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원자력이 위험한 것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것으로 이미지가 바뀌었다. 하지만 양산형 예거인 태권 시리즈는 원자력을 장착하지 않았다. 양산형에서 사용하기엔 위험도가 너무 컸던 탓이다. 대신 자체 개발한 신형 동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 사실이 원자력 업계를 공포에 빠뜨린 것이다.

원자력 업계의 로비는 상상을 초월했다. 양산형 예거의 전투 능력을 믿지 못하겠다는 이야기가 넘쳐났고, 쓸데없는 세금 낭비라는 전문가들의 칼럼이 연일 언론을 장식했다. 국제 사회의 압력도 만만치 않았다. 양산형 예거 태권의 성능이 실제 그대로라면, 그때 만들어지고 있던 예거들이 예산 낭비인 셈이 되기 때문이다. 예거 제작에 참여하도록 해주고 정치자금을 받은 정치인들은 훨씬 저렴한 양산형 예거의 등장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첫번째 전투에서 전파되어 사망한 태권Ⅳ의 파일럿 때문이었다. 군지도부는 훌륭한 인재를 사지로 내몰았다는 여론에 시달렸다. 게다가 대선도 얼마남지 않았다. 대통령은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을 경질하고 태권 프로젝트의 폐기를 명령했다. 신형 동력을 개발한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은 한국을 도망쳐 중국으로 탈출했다. 이들은 후일 크림슨 타이푼의 엔진을 만드는 데 투입되게 된다. 그리고 나는 불명예 제대를 해야만 했다.

그로부터 8년. 한국은 남쪽 주요 도시의 태반을 잃었다. 과학자들이 아무리 브리치를 감시해도 도쿄 셸터돔에서 발진한 예거가 한국까지 도착하는 속도는 늦었다. 그에 대한 공포로 한국은 가장 발빠르게 생명의 벽을 건설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토건국가답게 방벽을 건설하는 속도 역시 지독할 정도로 빨랐다. 하지만 시드니의 방벽이 뚫리는 것이 중계된 이후, 생명의 벽에 대한 믿음은 공포로 바뀌었다. 연일 정부를 성토하는 데모가 일어났고, 돈 많은 부자들은 중국 내륙 깊숙한 곳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나와 태권V는 다시 이 땅위에 섰다. 바뀐 정세는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태권 시리즈를 모두 깨우게 만들었다. 시민들의 공포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영웅이 필요했다. 우리에겐 이미 실전에서 승리한 전과를 가지고 있는 태권 시리즈가 있었다. 잘하면 한국은 카이쥬의 습격에서 안전할 수 있다. 못해도 최소한 당분간 공포는 잠재울 수 있다. 그렇게 우리들은 모두 대지에 발을 내렸다. 이제 다시, 우리가 인정받을 때가 왔다. 다시 무전이 왔다.

“여기는 태권1, 태권V 응답하라”
“여기는 태권V, 태권1과 드래프트 준비가 끝났다. 시작해 볼까?”
“오케이. 역시 금방 적응하는 군.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무슨 문제인가? 태권1의 점검이 아직 끝나지 않았나?”
“아니다. 태권1은 완벽하다. 문제는…”

그날 밤 9시 뉴스와 포털 사이트 1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대문짝만하게 박혀있었다.

“인류, 자유를 얻다! 브리치 완전 봉쇄 성공!”
“스태커 장군의 영웅적 희생- 집시 데인저 파일럿들은 모두 무사 복귀해”

그리고 나와 태권V는 다시 창고로 돌아가야만 했다. 끝.

* 며칠전 본 퍼시픽림 4DX에 대한 감상문입니다.
* 바쁘면 바쁠수록 잉여력은 폭발합니다…

About Author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