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감상에 있어 최적의 기기는 분명히 휴대폰이다”
이런 말을 누가 했을까? 얼핏 생각하면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발표하면서 말했을 것만 같다. 아니다. 아이러니하게, 이 말을 한 사람은 MS의 빌 게이츠다. 2005년 12월, 독일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과의 인터뷰에서 아이팟을 깍아내리며 한 말이다.
당시 마이크로 소프트는 윈도 모바일이라는 초기 스마트폰 운영 체재를 판매하고 있었으며, 그 안에는 윈도 미디어 플레이어의 포켓 PC 버전이 탑재되어 있었다. 빌 게이츠는 이 운영 체재를 이용해 만들어진 스마트폰에서 음악을 듣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빌 게이츠의 말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없다. 음악 감상을 할 수 있는 최적의 기기가 휴대폰인 것은 맞지만, 그것은 윈도 모바일폰이 아니다. 그럼? 당연히 아이폰이다. 지금은 누구도 윈도 모바일폰을 기억하지 않는다. 아니다. 미안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다들 끔찍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시장을 만드는 플랫폼 기업, 애플
애플은 결코 하이테크 기업은 아니다. 애플에서 사용되는 기술은 최첨단 기술이 아니고, 애플이 만들어내는 제품들도 최첨단 제품이 아니다. 아이팟 이전에도 숱한 Mp3 플레이어가 있었다. 아이폰 출시 이전에는 팜 트레오 600이 스마트폰 시장을 휩쓸고 있었고, 아이패드 출시 이전에도 MS가 만든 태블릿PC가 분명히 존재했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아이팟과 아이폰과 아이패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전 제품들은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 그런 것이 있었다라는 수준이었다면, 애플 제품들은 이전 시장을 뒤흔들고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풀이하면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기존에 있던 시장을 파괴하고, 새로운 참여자들에게 기회를 주며, 소비자들에게는 이익이 되는 것이라고.
때문에 애플의 행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항상 초미의 관심사였다. 애플의 행보 하나하나에 다른 산업이 영향을 받고, 객관적(?) 분석들과는 상관없이 현실을 바꿔버리는 일을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중국 나비의 날개짓이 뉴욕에 폭풍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이론을 증명이라도 하듯, 애플이 제품을 만들어 팔면 수없이 많은 부수 효과가 따라오면서 누구도 쉽게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장이 만들어진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애플이 하드웨어 기반 플랫폼 기업이기 때문이다. 애플에서 제품을 발표하면 그 제품으로 애플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아이폰 하나만 해도 아이튠즈를 통한 음원 판매, 앱스토어를 통한 어플 판매 및 주변기기 제조를 통해 수익을 올리는 개인과 기업이 여럿이다. 간단히 말해 애플 덕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 사람들이 있기에 애플 제품의 가치가 올라간다. 그만큼 애플은 멋진 제품을 만들어낸다. 그런 애플이 조만간 아이클라우드 서비스를 시작할 예정이다.
응? 그런데 뭔가 조금 낯설다. 이번엔 제품이 아니라 서비스다. 게다가 뭔가 편리할 것은 같은데, 확실히 뭐가 좋은 지는 잘 모르겠다.
아이클라우드 때문에 시장이 떨고 있다
애플 아이클라우드 서비스를 간략히 정의하자면 “컴퓨터 없이 아이폰을 쓰도록 해주는 서비스”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까지 아이폰은 컴퓨터가 있어야 쓸 수 있는 기기였다. 아이폰 구입 후 가장 처음 하는 일이 뭔가? 바로 컴퓨터에 연결하는 것이다. 음악과 영화를 전송하는 것도, 백업하는 것도 모두 컴퓨터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런 번거로움에 이젠 ‘잘가’하고 말하는 것이 애플 아이클라우드 서비스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아이폰이 고장나 AS 센터에 갔더니 다른 제품으로 바꿔준다. 리퍼 제품을 받은 당신이 할 일은 먼저 와이파이가 되는 지역을 찾아서 아이폰을 켜는 일이다. 그리고 자신의 애플 아이디를 입력한다. 그걸로 끝.
그것만으로도 예전에 구입했던 앱과 음악, 주소록, 사진 등이 고스란히 새로운 아이폰으로 넘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저장이 끝나면 이전 아이폰에서 쓰던대로 새로운 아이폰을 그냥 사용하면 된다. 내 아이폰에 담긴 대부분의 정보들이 알아서 애플 서버에 저장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저장할 서버를 제공하고 그 서버와 당신의 아이폰을 동기화 시킬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합쳐진 것이 바로 아이클라우드다. 귀찮게 PC를 켜서 동기화 시킬 필요도 없고 음악 한곡 전송하기 위해 끙끙댈 필요도 없다. 올해 가을부터, 모든 것은 당신 손 안에 쥐어진 아이폰 안에서 이뤄진다.
아마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런데 그게 뭐가 어째서?” 라고 되물을 것이다. 아이클라우드만큼은 아니지만 온라인 동기화와 백업은 이미 안드로이드폰에서는 당연하게 제공되는 기능이기 때문이다. 구글 주소록, 캘린더, 지메일, 피카사를 통한 구글 서비스와의 동기화를 당연한 듯 사용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애플의 아이클라우드 서비스 발표가 호들갑스럽게 여겨질 만도 하다.
하지만 시장을 분석하는 애널리스트들은 조금 다른 것 같다. 벌써 투자 유망 종목을 발표하면서 애플 클라우드 서비스가 뜨면 이 회사들 주가가 올라갈 것 같다고, 그러니 투자하라고 요란을 떤다. 애플과 경쟁하는 입장에 놓인 다른 회사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이미 클라우드 서비스를 하고 있다고, 우리도 클라우드 회사라고 홍보하기에 여념없다. 이런 분위기에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은 PC를 만들어 파는 회사들이다. 이들은 더 이상 PC가 팔리지 않을까봐 걱정한다. 누가? DELL, HP, 인텔, MS가!
손해 보는 사람과 이익을 남기는 사람
물론 PC 시장이 당장 없어지진 않을 것이다. 다만 가정에서는 세탁기나 냉장고 같은 백색 가전처럼 집안 한 귀퉁이에 놓여져 필요할 때만 쓰는 기기로 변해갈 것이 분명해 보인다. 대신 모바일 기기를 보다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기들이 많이 판매되기 시작할 것이다. 아이패드를 통해 집안의 모든 가전 제품들을 제어하고 그 전기 사용량을 추적해 관리하는 일도 이젠 꿈이 아니다. 그렇게 저장된 정보는 클라우드 서버에 저장되고 언제라도 꺼내 이용할 수 있도록 될 것이다.
이동통신사업자들의 변화도 지켜봐야 한다. 클라우드 서비스는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것을 가정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과 연결될 수 있으면서도 저렴한 서비스를 원하는 소비자들의 요구가 폭발할 것이다. 지금과 같은 엉터리 3G 망 서비스에선 불만이 크게 터져 나올 가능성이 높다.
가장 큰 변화는 포털 사이트, 카페, 메신저 서비스 등 그동안 PC를 이용해 쓰는 것을 가정해 왔던 웹 서비스들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PC를 이용해 인터넷에 접속하는 사람들이 점점 적어진다면, 네이버에 돈을 내고 광고를 하려고 할까? 지금처럼 네이버 1면을 통해 영향력을 과시하던 신문 기사들이 그만큼의 가치를 가지게 될까? 자신이 원하는 검색 결과를 내주지 못하는 검색엔진을 계속 이용하려고 할까? 모바일에서 사용할 수 없는 메신저 서비스를 계속 이용하려고 할까?
같은 의미에서 크로스 플랫폼을 지향하는 서비스들도 크게 늘어날 것이다. 현재 애플이 제공하는 서비스들의 가장 큰 단점은 모든 것이 애플 제품들끼리만 호환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 모두가 애플 제품을 쓰지는 않는다. 그런 단점을 보완해줄 앱과 서비스들이 계속 나올 것이다. 아이클라우드의 단점을 보완해주는 서비스나 클라우드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보안 기술 산업이 더 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직은 불안한 클라우드 서비스
모든 것이 클라우드로 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최근 발생한 룰즈섹을 위시한 일련의 해킹들에서 보듯, 모든 것이 클라우드 서비스로 전환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위험하다. 내가 사용하는 정보들을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해커들의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는 것은 클라우드 서비스가 우리에게 주는 불안감이다.
아이클라우드 역시 다르지 않다. 1억이 넘는 아이폰 이용자들의 정보가 저장된 서버는 분명히 해커들의 달콤한 먹잇감이다. 이중삼중으로 보안장치를 한다고 해도 어쩌다 한번 보안이 뚫려버리면, 우리는 상상하기 어려운 황당한 상황에 처하게 될 지도 모른다. 나비의 날개짓이 어디로 향할지 알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런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다만 추측할 수 있을 뿐.
분명한 것은 이미 변화는 예전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 아이클라우드가 발표되기 이전부터, 우리는 이미 클라우드 서비스를 아무 생각 없이 이용하고 있었다. 메일, 블로그, 웹하드, 온라인 커뮤니티, 미니홈피 배경음악, 뉴스, SNS 등 대부분의 웹 서비스가 본질적으로는 클라우드 서비스다. 이제 와서 새로운 이름이 등장하니 새롭게 여겨지지만, 알고 보면 아주 오래된 것들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정말 그러냐고? 사실이다. 실은 해외와 한국이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보편화된 월정액제의 초고속 인터넷망을 계속 이용해오면서, 오래 전부터 클라우드 서비스를 당연시 하며 이용해 왔다. 때문에 한국에서 아이클라우드는 생각보다 큰 반향을 불러오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저 자동 백업 정도로만 인식될 수도 있다. 그래도 한 번 기다려볼 일이다. 애플의 날개짓이 과연 이전처럼 세계를 바꿀지, 아니면 그냥 작은 날개짓에 멈추고 말지를.
확률은? 솔직히 말해 높지는 않다.
: 글을 읽다가 이건 또 뭐지? 하는 생각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예, 맞습니다. 2011년 8월호 아레나 옴므...-_-에 보낸 글입니다. 오늘 이런 저런 자료를 정리하다가, 옛 글을 발견하게 되서 백업 차원에서 올려 놓습니다. 이 이후로 과연 어떻게 변했는지, 한번 비교해 보시는 것도 재밌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