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생활 대백과', 해방 이후부터(응?) 1990년대까지 한국에서 나온, 프라모델들을 다룬 책이다. 그러니까 '20세기 소년 생활'에 관한 책이랄까. 얼핏 들으면 에세이집처럼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상품 카탈로그에 더 가깝다.
카탈로그가 무슨 재미가 있냐고? 무슨 소리. 난 성경보다 카탈로그를 더 많이 읽었다. 어릴 적 옆 집 친구가 버리고 이사 간 '미국 백화점 어린이 상품 카탈로그(테마는 개구쟁이 스머프)'는 백여 번은 더 넘게 읽은 것 같다. 감동했다고나 할까. 스머프 캐릭터 하나로 여성 잡지 한 권 분량의 상품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 난 지금도 그렇게 열심히 책을 여러 번 읽은 기억이 없다. 심지어 그때 나는, 영어도 읽을 줄 몰랐다. 하긴, 영어를 몰랐으니 그렇게 여러 번 '볼' 수 있었겠지. 그 영어 다 읽으려면 시간이 얼마야...
사실 나온 줄은 모르고 있었는데, 신문을 읽다가 우연히 이 아저씨 인터뷰를 봤고, 그 기사에서 책이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국산 플라스틱 모형의 역사'라길래 앞뒤 안재고 냅다 주문했다. 아싸. 내가 기대한 그 이상이었다. 진짜 한국에서 나온 20세기 프라모델들의 박스 사진이, 대다수 수록되어 있었다. 슬프게도 절반 이상은 내가 본 적도 없는 물건들이었지만. 한국 프라모델의 역사가 이리 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관심 있는 사람은 알고 있겠지만, 이런 종류의 책은 일본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다. 정말 흔하게 볼 수 있다. 게다가 최근 몇 년 동안은 7~80년대 일본의 버블 경제 시기를 되돌아보는 붐이 일어서, 온갖 잡지와 무크지들이 쏟아져 나왔다. 일본인들 특유의 꼼꼼한 자료 정리 덕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엔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이 부끄럽게 기록 따위엔 관심 가지지 못한, 여전히 전쟁 직후 마인드, 또는 독재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이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는 탓이다(라고 우겨본다.).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데 기록 따위는 무슨.
그런데 드디어, 한국에도 나왔다. 게다가 당시 한국 프라모델계의 역사를 나름 꼼꼼히 정리해서 소개하고, 어떤 흐름들이 어떻게 이어져 왔는 지도 정리해 뒀다. 단순한 카탈로그가 아니다. 일종의 문화적 기록이라고 해야 할까. 정말 이 책, 아무나 만들 수 없는 책이다. 그때 그 시절의 상품들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면, 절대 만들 수 없는 책이다. 히야. 정말 잉여로움이 넘쳐나서 세상을 이롭게 하는구나... (응?).
문화지라고 하지만 소재가 소재다 보니, 추억 보정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디오라마를 만들어서 상을 받았던 지프차 모형이, 태어나서 처음 만들어본 1/100 건담 건프라가, 나에게 뭔가 새로운 세계(주역 기체가 아니어도 건프라가 존재해!)를 알려줬던 건캐논 등등을 다시 볼 수 있었을 때는 정말, 눈물이 날 것만 같기는 개뿔이. 그냥 흐뭇한 아저씨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몇 달 전에 이때 건프라를 복각한 제품들을 다시 만들어 봤는데, 정말 다시 만들 물건은 못 되었었거든...-_-;
애틋한 추억이 담긴 프라모델... 이 아니라 레진 키트도 볼 수가 있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없었던 종류의 키트가, 없었던 캐릭터들이 출시되었다는 것에 의미를 뒀지만... 야한 생각으로 꽉 찬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던 내게 그런 건전한 생각이 자리 잡을 틈 따위는 없었다. 위에 보이는 '여경 리퀘어(아마도 사일런트 메비우스?)'의 키트를 사가지고 와서, 줄칼을 들고, 누드모델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었다.
... 참고로 당시엔 인터넷도 없고, 나는 학원도 안 다니는 못된(?) 학생이었기 때문에, 방과 후 시간이 많이 남았다.
옆에 누드모델로 만들기 쉬워 보이는 '더티 페어' 캐릭터들을 놔두고 왜 힘들어 보이는 '여경 리퀘어'를 골랐냐고 묻는다면, 보는 눈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 인터넷이 없었으니 매장에서 직접 물건을 구입해야만 했고, 매장 알바형 눈이 있으니 차마 야한(?) 제품을 대놓고 사는 것은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겉보기에는 착한 학생이 되고 싶었으니까.
성공했냐고? 그럴 리가. 줄자와 사포로 플라스틱 표면을 문질러 옷을 벗겨내고 누드로 만들겠다는 나의 계획은, 줄질을 계속하고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지나친 줄 질로 인해 가슴 부위에 펑크... 가 나면서 끝이 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포기가 굉장히 빠른 것은 나의 장점이라, 펑크를 때울 생각도 못하고 얌전히 프로젝트를 폐기했다. 사실 한 달이나 줄질 하면서 굉장히 힘들었다...-_-;
보물섬 종합 선물세트는 정말 진심으로 가지고 싶었던 프라모델이었다. 당시 잡지에 실린 광고를 보고 엄청나게 설레었고, 문방구에 문의해 언제 들어오는지 날짜까지 확인해 뒀다. 밤에는 하느님께 기도도 드렸다. 제발 비싸게 나오게 해 달라고. 비싸서 아무나 못 사게 해 달라고. 한 5000원쯤 되게 해 달라고. 그리고 다음날 바로 달려갔다. 엄청나게 크고 위풍당당한 박스가 보였다. 가격도 위풍당당했다. 15000원.
... 아무나 살 수 없는 가격으로 나온 것으로 봐서, 하느님이 내 소원을 들어주셨음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 '아무나'에 포함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질 못했지... 결국 사지 못했다. 지금도 꿈의 프라모델에 가까운 제품이다.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어 돈을 벌었다고 한들 어디 구할 수가 있어야지.... 뭐, 샀어도 실망했을 것이 분명하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책은 그런 책이다. 누군가가 꿈과 희망을 담아 자료를 모으고 책으로 만들었다. 가만히 보면 정말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 그리고 꿈과 희망이 있었던(?) 누군가들은 이 책을 읽고 행복해할 것이다. 나보다 나이 많으신 형님들은 정말 정말 읽으면서 행복해질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한 때 소년이었고, 내 생각엔, 그 시절에 프라모델을 사서 만들 수 있었던 소년들은, 그래도 나름 유복한 집 자식들이었음이 틀림없으니까 말이다.
... 언제나처럼 이상한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