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부터 두 남자의 입에서 풀려나오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 이야기.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SF 옴니버스 드라마, ‘블랙 미러’ 시즌 2의 마지막 단편이자, 크리스마스 스페셜로 방영된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이렇게 시작한다. ‘검은 거울’이란 제목처럼 기술 발전으로 인해 나타날지도 모를, 우울한 미래 모습을 묘사한 여러 단편으로 구성된 드라마다. 그중에서 특히 이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꼭 추천하고 싶은 에피소드.
… 어쩌면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가능성이 없지도 않은, 정말 무시무시할지도 모를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제드 아이, 인간의 눈에 이식한 혼합현실 카메라
‘화이트 크리스마스’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눈에 ‘제드-아이’라는 기기를 이식한 상태로 살고 있다. ‘제드 아이’는 카메라이자 디스플레이 장치로, 덕분에 이 세계에서는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필요한 작업이 있으면 단추 모양의 작은 컨트롤러를 손에 쥐면 그만이니까. 그럼 홀로그램 인터페이스가 단추 위로 떠오르고, 그중에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면 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찍고 싶다면? 카메라 아이콘을 선택하고, 그 사람을 눈으로 바라보며 버튼을 누르면 된다. 내가 보는 장면을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중계할 수도 있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을 차단할 수도 있다. 이런 것을 MS에서는 혼합 현실(Mixed Reality)이라 부르고, 인텔에서는 융합 현실(Merged Reality)이라 부른다. 마치 눈뜨고 꿈을 꾸는 것처럼, 현실과 가상이 구별되지 않고 하나로 어우러져 보이는 세계.
제드 아이가 가진 다른 장점은 우리가 보는 이미지와 소리를 왜곡할 수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가 꼴 보기 싫다면? 버튼 한 번만 누르면 그 사람은 ‘실루엣’으로 처리되고, 그 사람이 내는 소리도 잡음으로 변한다. 안면 인식 기술이 적용되었기에 사진에 담긴 그 사람의 모습조차 실루엣으로 변해 버린다. 내가 사는 세계에서 누군가를 지워버리고, 저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내가 지워지게 된다.
… 온라인 공간뿐만이 아닌, 현실에서도 구현되는 관계 차단 기술.
이런 기술이 진짜로 등장할 수 있을까? 관련 기술 연구는 오래전부터 진행되고 있다. 반도체와 세포막을 결합한 생체 반도체 기술이나 반도체와 신경 세포를 결합한 뉴로 칩(Neurochip)은 이미 선보였다. 구글 자회사 베릴리에서는 인간 눈의 수정체를 교체해 여러 가지 능력을 부여하는, 전자 부품이 담긴 인공 수정체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소니는 영상 촬영이 가능한 스마트 콘택트렌즈 특허를 이미 출원했고, 매직 리프는 눈에 직접 영상을 보여주는 콘택트렌즈 디스플레이 기술 특허를 냈다. 그러니까, 막연한 상상만은 아닌 셈이다.
쿠키, 당신 자신을 닮은 인공 지능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중요한 다른 기술은, 바로 한 사람을 카피한 인공 지능 ‘쿠키’다. 오랫동안 나를 지켜보면서,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인공지능 비서. 말만 들어도 솔깃하지 않은가?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지금, 나 대신 내 맘에 쏙 들게 잡다한 여러 가지 일들을 대신 처리해줄 사람을 상상해 보는 것은 많이들 해봤을 테니까.
여기서 핵심은 나를 오랫동안 관찰했다는 것. 나와 가장 오랜 시간 함께한 사람은? 당연히 바로 나 자신이다. 쿠키는 이쯤에서 등장한다. 지금은 인터넷에서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기록하기 위해 사용되는 파일 이름이지만, 미래엔 내 안에 설치해 내 생각을 그대로 카피하는 인공 지능의 이름으로 변해서.
앞서 등장한 요리하는 남자의 진짜 직업이 여기서 밝혀진다. 쿠키를 사용하기 위해선 먼저 인간의 몸에 설치해 주인의 생각을 카피해야만 한다. 카피된 쿠키를 수술을 통해 뽑아낸 후에, 스마트홈 허브에 설치해 사용하게 된다. 문제는 카피된 인격이, 처음엔 자신이 인공 지능이란 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인정하질 않으니 당연히 일도 안 할 테고.
그 인공 지능을 설득하는, 또는 굴복시키는 일이 이 남자가 하는 일이다. 원래 말로 남을 코치하거나 설득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니, 인격이 카피된 인공 지능 역시 자신의 업무 범위에 포함된 것 같다. 물론 인공 지능을 사람처럼 대하지는 않는다. 폭력적이진 않지만 잔인할 수도 있는 방법을 쓰니까.
말로 하면 괜찮은데 보다 보면 조금 섬찟하다. 저 안에 들어있는 것은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인격이라서, 그것을 길들이는 과정은 다른 이가 우리를 길들이는 과정으로도 써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가올 트랜스 휴먼 시대에서
‘인격을 전송한다’는 개념 자체는 SF 영화나 만화에 지겹도록 많이 나왔으니, 쿠키-의 개념이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 같다. ‘정신 전송’이라고 불리는 이 개념은, 주로 불로장생을 꿈꾸는 악당들이 몸을 옮겨 다니면서 쓰는 방법으로 많이 나온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애니 ‘공각 기동대’에서는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를 담고 있는 소재이기도 하다.
더불어 기술이 인간과 일체화된, 미래 인간을 지칭하는 ‘트랜스 휴먼’을 다룰 때도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 불가능하게 보이지만 실제로 트랜스 휴먼을 추진하고, 정신 전송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은 있다. 이들이 2007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주최한 워크숍에 모인 사람들은, 인간의 뇌를 에뮬레이션 하기 위해 먼저 두뇌 지도를 그리자는 로드맵을 내놓았다. 2013년엔 백악관에서 인간 뇌 지도 연구 프로젝트 실시를 발표했으며, 작년엔 실제로 인류 역사상 가장 자세한 뇌 지도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 물론 뇌 지도를 만들다 보니, 이 지도를 이용해 자폐나 알츠하이머 등 여러 가지 뇌 질환 치료의 가능성을 보게 된 것이 뇌 지도에 연구비가 투입된 진짜 이유이긴 하지만.
자- 이쯤에서 마지막 상상이 끼어든다. 우리 눈에 카메라 센서와 디스플레이를 내장하는 것, 정신을 카피하는 것 모두 트랜스 휴먼의 영역에 속해 있다. 일단 장착된 것은 쓰이게 되어 있고, 쓰다 보면 도구의 존재 자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가 ‘전기’와 ‘상하수도’ 등을 원래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그럼 만약 ‘제드 아이’와 ‘쿠키’가 일상화된 세상에선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될까?
드라마를 보면 그런 상상력이 어떻게 발휘되는지 볼 수 있다. 놀랍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우울해지기도 한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주제이기도 하고. 이런 이야기가 맘에 든다면, 오늘 밤 자기 전에 한번 상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여기서 내 상상을 풀어놓는 것은 읽는 사람들의 즐거움을 빼앗는 일이 될 테니, 꾹 참도록 하겠다.
* 이 글에 인용된 모든 사진의 저작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으며, 이 글에선 드라마 비평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밝힙니다.
* 이 글은 SK 하이닉스 블로그에 투고한 글을 정리해서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