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아이리버라는 회사가 있었습니다. 아, 아니죠. 출발할 당시 이름은 레인콤이었고, 나중에 아이리버로 사명을 변경했으며, 지금은 드림어스컴퍼니로 이름을 바꿨군요.
다만 여기서는 그저 아이리버라고 부르겠습니다. 우리 청춘과 함께했던 MP3 플레이어를 만들었던 회사, 1999년부터 2009년까지의 그 회사 말이죠. 이 글을 읽으실 분들이 기억하는 아이리버라면, 딱 이때의 아이리버잖아요?
다른 분들이 그렇듯, 저도 이때의 아이리버 제품을, 참 좋아했습니다. 망한 이유야 많겠지만, 살아날 방법은 없었을까-하고 생각해볼 정도로요. 한 치 앞도 모르는 거야 인류 최악의 숙명이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과거를 돌이켜 볼 수 있는 것은 인류의 특권.
그래서 한 번 옛 자료를 뒤져봅니다. 아이리버, 정말 살아날 기회가 없었는지 궁금해서요.
인터넷 보급이 만들어낸 휴대용 MP3 플레이어 시장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적으려니 맥이 쫙-하고 빠지는데요. 사실이 그렇습니다.
왜 그럴까요? 먼저 과거로 한번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MP3 오디오 압축 규격이 정해진 건 1993년입니다. 이미 특허가 만료됐을 정도로 오래된 포맷이죠. 조금 손실되는 부분은 있지만, 오디오 음원 파일 용량을 1/10 까지 잘 압축해주기에 PC에서 음악을 들을 때 많이 쓰였습니다.
오래전 컴퓨터에 달린 하드 디스크는 몇백 메가바이트 수준이라, 이런 기술 없이 음악을 들으려면 힘들었습니다. CD-ROM 드라이브도 90년대 중반에야 대중화되었고, 윈도95가 나오기 전까진 CD로 음악을 들을 때는 다른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도시 전설처럼 들리겠지만 정말입니다.
지금이야 CD-ROM 드라이브가 뭐야? 하고 궁금해하실 분도 계시겠지만요. ... 사실 저도 이름이 금방 생각 안 나 고생했습니다.
좋은 규격이고 많이 쓰이기는 했는데, 별다른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습니다.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고 냅스터 같은 P2P 파일 교환 프로그램이 등장하기 전까지는요. MP3 파일을 만드는 것도 품이 많이 들고, 네트워크 속도가 느려서 쉽게 공유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1999년쯤 되니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이때가 닷컴 버블이 한창일 때였는데요. 거의 충격과 공포에 가까운 반응을 몰고 왔습니다. 음반을 안 사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거니까요.
초고속 인터넷이 적극적으로 보급된 한국은 더했습니다. 소리바다 같은 유사 냅스터 서비스가 등장했고, 당시 인기 인터넷 검색 사이트였던 엠파스에선 2002년 베스트 검색어로 MP3를 선정했을 정도입니다.
음반 산업은 풍비박산 나서, 2000년 4,103억 원으로 정점을 찍었던 국내 시장 규모는 2004년 1,338억 원, 2007년 788억 원 규모로 꼬꾸라지게 됩니다(한국 콘텐츠 진흥원, 2011 음악산업백서).
손해를 보는 쪽이 있으면 이익을 보는 쪽도 있겠죠?
MP3를 CD에 담을 수 있게 해주는 CD 레코딩 장치(CD-R, CD-RW 드라이브), 고급 PC 스피커, 대용량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 및 윈앰프 같은 MP3 재생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얻었지요. 덤으로 PC 교체 수요 및 초고속 인터넷 보급에 일조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게임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컴퓨터를 멀티미디어 장비로 쓰게 된 셈입니다.
MP3 플레이어 역시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MP3 파일을 들을 수 있는 휴대용 플레이어가 없었거든요. 이때만 해도 MP3 음원을 이동하면서 듣고 싶다면, MP3를 CD 음반 형식으로 변환해서 CD 플레이어로 들어야 했습니다.
아이리버가 등장한 건 딱 그때쯤입니다. 1999년, 삼성전자를 퇴사한 양덕준 사장이 레인콤을 만들었죠. 초기에는 완제품이 아니라,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칩과 솔루션을 팔고, 로열티를 받을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구상한 사업 분야가 MP3 플레이어 솔루션이었고요.
그때가 2000년쯤이었는데요. 사실 이때 이미 새한정보시스템에서 만든 세계 최초의 MP3 플레이어 엠피맨(mpman-F10, 1998)이 나와 있었습니다. 아쉽게 이 제품이 많이 팔리진 않았지만, RIO PMP 300(1998)을 비롯해 뒤이어 나온 몇몇 제품이 성공하면서 ‘휴대용 디지털 음악 플레이어’ 시장이 열리기도 했죠.
예, MP3 플레이어 시장은 RIO PMP 300이 만들었습니다. 제품이 뛰어났다기보다는 법적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MP3 플레이어의 파괴력을 감지한 미국 음반 산업 협회(Record Industry Association of America, RIAA)에서 RIO PMP 300을 만든 다이아몬드 멀티미디어사에 재깍 소송을 걸었는데, 미 법원에서 CD에 담긴 음악을 MP3로 만들어 MP3 플레이어에 넣는 건, 저작권법상 정당하다고 판결 내렸기 때문입니다(공정 이용에 해당).
덕분에 RIO PMP 300은 20만 대를 팔게 됩니다. 성공하면 당연히 시장 참여자가 늘어나죠? MP3 플레이어를 만드는 것 자체는 어려운 기술이 아니기에, 이후 수많은 MP3 플레이어 제조업체가 난립하게 됩니다. 양덕준 사장에 따르면, 2000년 당시 국내에만 130여 개가 넘었다고.
아이리버 브랜드가 태어났지만
이들에게 솔루션을 잘 팔 수 있었다면 과거의 아이리버는 없었을 겁니다. 문제는 이때 팔려고 했던 솔루션이 CD 타입 MP3 플레이어였다는 겁니다. 국내 제조업체 중 CD 타입 MP3 플레이어를 양산해본 회사가 없어서, 솔루션을 팔았는데 생산 지도까지 해야 할 상황이 됐습니다.
이럴 바엔 직접 제품을 만드는 게 낫습니다. 물론 제품 제조는 칩을 파는 일보다 훨씬 큰일이라, 문제가 한둘이 아닙니다. 다행히 양덕준 사장이 인맥이 넓어 자금과 생산 문제를 해결했고, 같이 있던 이래환 부사장이나 이용현, 이덕현 이사 등은 뛰어난 엔지니어였습니다.
어떻게든 만들어낸 시제품을 보고, 앞서 말한 다이아몬드 멀티미디어가 다른 회사와 합병해서 태어난 소닉블루에서, 느닷없이 제품을 만들어 달라고 한국에 찾아옵니다. 2001년 미국에는 소닉블루, 한국에는 아이리버란 이름으로 팔렸던 첫 번째 MP3 CD플레이어 iMP-100는 이렇게 태어났습니다.
여기서 잠깐. 남들 다 플래시 메모리 타입 MP3 플레이어를 만들 때, 왜 아이리버는 CD 타입 플레이어를 만들었을까요? 당시 메모리 가격이 정말 비쌌거든요. USB 포트를 안 쓰던 시기라, 쓰기도 어려웠고요.
반면 공 CD 가격은 정말 쌌고, 쓰기 쉬워서 MP3 CDP가 더 인기 있었습니다. MP3 CDP가 플래시형 MP3보다 더 만들기 어려워서, 경쟁사도 적었고요.
이후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슬림X라는 초박형 MP3 CDP가 히트하고, 2002년에는 미 베스트바이에서 플래시 메모리 타입 MP3 플레이어 주문도 받고(조금 복잡한 사정은 있었지만), 이노 디자인도 섭외하면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이리버 브랜드가 태어납니다.
초기 히트작인 삼각형 MP3 플레이어 프리즘(IFP-100, 100만 개 넘게 팔았습니다), 크래프트(iFP-300, 프리즘보다 더 많이 팔았습니다.) 등이 이때 나왔죠. 플래시 메모리 타입 MP3 플레이어 판매량 세계 1위, 한국 1위를 차지하던 때입니다.
2004년 매출만 4,540억 원. 주가는 한 때 12만 원대까지 오르기도 했습니다. 뛰어난 기술력, 펌웨어 업데이트 같은 사후 서비스, 빠르게 내놓는 신제품, 멋진 디자인에 운과 시장 흐름, 미국 시장에서 성공한 한국 기업이란 이야기까지 잘 맞아떨어져, 대박이 난 겁니다.
... 다만 이 이야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첫째, 시장 초기라서 시장 규모 자체가 작았습니다. 2000년 MP3 플레이어 세계 전체 판매량은 210만 대 정도고, 2002년에는 523만 대, 2003년에는 731만 대 정도입니다(IDC 기준). 한국은 2003년 한 해 217만 대를 생산하고, 161만 대를 수출했습니다(통계청 자료 기준, 모두 전자산업 연구소에서 작성 ‘MP3 플레이어 산업 동향’에서 인용)
둘째, 아직 애플과 아이팟 이야기가 안 나온 것, 눈치채셨죠? 2001년 출시된 애플의 MP3 플레이어 아이팟은, 2세대에서 윈도우 PC를 지원하고(2002), 3세대에서 USB 연결을 지원하면서(2003) 본격적인 인기를 끌게 됩니다.
3세대 이전에 팔린 아이팟이 백만 대, 3세대 출시 이후 6개월간 또 백만 대가 팔리고, 1년 동안 팔린 아이팟은 300만 대에 달합니다.
그 후 18개월간 900만 대가 더 팔렸고, 2011년 아이폰 이벤트에서 밝힌 내용을 보면, 출시 이후 10년간 약 3억 대의 아이팟을 팔았습니다. 휴대용 음악 플레이어 시장 78%를 차지했죠.
잘되면 항상 애플이 끼어든다
2003년으로 한정해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진 않습니다. 당시 세계 하드디스크형 MP3 플레이어의 시장의 70% 이상, 전체 MP3 플레이어 시장의 21.6%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요(아이리버는 14.1%).
아이리버가 미국 시장에서 안착하고, 국내 시장에서 다시 선방하면서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미 진입하자마자 시장이 크게 흔들리고 있던 셈입니다.
여기에 애플은 아이리버에게 없는 몇 가지 강점이 있습니다.
우선 음반사와 적대적이었던 다른 MP3 제조업체와 달리, 소프트웨어(아이튠즈)와 음악 마켓(뮤직 스토어), 하드웨어(아이팟)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애당초 저작권 소송에서 졌던 미 음반사들이 연합해 MP3 파일을 파는 마켓을 만들려다 실패하고, 그 연합에 참여했던 애플이 만든 정식 음원 서비스니까요.
돈도 있고 실력도 있고 잔인하기도 합니다. 플래시 메모리를 저렴하게 대량으로 사들인 다음, 기존 플래시 메모리형 MP3 플레이어보다 훨씬 싼 가격에 팔았을 정도로.
나중에 아이리버도 콘텐츠 마켓 등에 신경 쓰게 되지만, 미국에서 애플은 이미 넘을 수 없는 벽이었고, MS와의 연합도 실패했으며, 한국 음원 시장은 2008년 문화관광부에서 중재안을 내놓은 다음에야 여러 갈등을 봉합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지나친 홍보비를 지출하고, 상장 이후 내부 다툼이 벌어졌으며, 하드 디스크형 MP3 플레이어를 내놨다가 품질 문제로 큰 손해를 보는 일 등이 겹쳐, 아이리버는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나중에 주요 임원이 바뀌고, 보급형 MP3 플레이어와 전자사전이 인기를 끌면서 명맥은 유지하게 되지만요.
아이리버가 갔어야 할 길?
아이리버만 망한 건 아닙니다. 2000년대 초기 애플과 겨루던 MP3 제조업체 중에 대기업인 소니, 삼성전자 등을 빼면 제대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기업이 별로 없습니다. 둘 다 스마트폰 시대까지 버틸 기술과 역량이 있는 기업이었죠. 음향이나 메모리 기술에 기반을 둔 기업은 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고요.
아이리버 고객이었던 소닉블루는 2003년에 일찌감치 파산했습니다. 아이리버가 살아남으려면 일찌감치 휴대폰 사업에 신경을 쓰면서 통신기기 관련 기술을 키웠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당시 삼성전자나 LG전자가 가만히 두고 봤을 리가 없습니다(아이리버 프리스타일 폰은 2010년에야 나옵니다.).
당시 이동통신사는 휴대폰에 3.5파이 일반 이어폰 단자조차 못 달게 했었고요(애플은 나중에 없앴지만, 한국 시장에서 판매되던 피처폰에는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몰랐던 것도 아닙니다. 아이리버 W10 같은 인터넷 전화기도 내놓고, G10 같은 와이브로 모바일 게임기 콘셉트도 선보였으니까요. 심지어 실수로 유출된 기기 중에는 초기 스마트폰 같은 제품도 있었습니다.
양덕준 사장이 아이리버를 떠나 만든 기기는 ‘민트패드’라는, 네트워크 PMP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특이한 콘셉트를 가진 제품이었죠.
아쉽지만 이통사는 아이리버를 진심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와이브로 같은 썩은 동아줄을 내민 걸 보면 알죠. 그걸 또 덥석 잡은 아이리버가 실력이 없었던 걸지도 모르지만요.
조금 더 버텼으면 다른 기회가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스마트폰 보급과 함께 크라우드 펀딩이 활발해지면서, 관점이 다른 특이한 기기도 세상에 빛을 볼 기회가 주어졌으니까요. 뭐, 다 지난 이야기이긴 합니다.
앞서 말했지만, 아이리버는 운이 참 좋았습니다. 실력도 있었고, 철학도 뚜렷했고, 밀려드는 파도에 잘 올라탔으니까요. 문제는 파도에 올라탄 다음, 균형을 잡기가 올라타기보다 훨씬 더 힘들다는 겁니다.
실력 있는 동료는 분란을 일으킵니다. 소비자는 점점 더 까다로워지고, 더 나은 제품을 만들기는 힘들며, 경쟁자는 하필 애플, 삼성 같은 회사입니다. 투자자는 더 빨리 더 많이 팔라고 괴롭힙니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한데 엉뚱한 곳에 이미 써버렸습니다. MP3 플레이어 전성기는 빨리 지나갔고,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스마트폰이 등장했습니다.
사업은 큰 흐름을 포착하고 재빠르게 올라타는 능력이 중요한데, 그걸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데도 아이리버가 살 기회가 있었다고 말하는 건, 나쁜 농담일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2009년까지의 아이리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전 지금도 아이리버 프리즘을 봤을 때의 신기함을 잊지 못합니다. 아이리버 U10은 너무 예뻐서 좋아했고, 클릭스는 지금도 제겐 최고였던 MP3 플레이어입니다.
소프트웨어적인 문제가 꽤 많았지만, 이 당시 아이리버는, 살면서 사고 싶어 안달했던 몇 안 되는 제품을 만들던 회사였습니다. 빅 테크 기업들이 세계를 장악하기 전, 작은 회사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마지막 꿈을 꿨던.
이 글은, 잠깐이지만, 그런 설렘을 가져다준 회사에 보내는 작별 인사입니다. 아아, 좋은 꿈이었습니다. 이루어질 순 없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