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출교 조치가 정말로 드러내는 것

고려대 출교 조치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출교란 것이, 전체 한국 대학 사회를 통틀어도 거의 시행된 적이 없는 초강수에 해당하는 조치라서, 관심있는 사람들은 좀 얼떨떨-한 느낌입니다(제가 알고 있기론, 90년대 후반 삼성재단이 들어온 성균관대에서, 학생회관 점거했다가 발견한 학교측 내부 문건을 폭로한 당시 총학생회장에게, 출교조치를 내린 사건 밖에는 없습니다.)

처음 든 생각은, 또 고려대야? 라는 것. 예전 삼성 이건희 회장 사태에 대한 교수들의 대응도 그렇고, 극우주의 발언을 했던 교수도 그렇고, 검은 옷 입고 반학생회 시위했다는 것도 그렇고, 밖에서 보여지는 고려대는, 점점 우익 대학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듯 보입니다…o_o;;; (그냥 그렇게 보인다는 이야기입니다. 분석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 그럴 가치가..-_-;;)

그런데 몇몇 자료들 살펴보니, 당황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몇자 적습니다. 일단 밑의 고려대 출교 사태에 관련된 자료를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학교측의 주장과 학생측의 주장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버림받은 고대 보건대학 학생들

사건의 구성은 간단합니다.

① 고려대와 고려대 병설 보건 전문대가 통폐합됩니다.
② 보건전문대 총학생회는 고려대 총학생회 소속의 단과대 학생회가 됩니다.
③ 그러자 고려대 당국은 보건전문대 학생들을 고려대 학생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하며,
그들에게 총학생회 선거 투표권을 주면 총학생회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④ 이에 항의하고 요구안을 전달하기 위해 학생들(총학생회 + 보건전문대)은 교무위원회 회의를 항의방문합니다.
⑤ 교무위원들은 보건전문대생들을 고려대생으로 인정하지 못하니 나가라고 하며, 요구안 접수 자체를 거절합니다.
⑥ 학생들은 요구안 접수를 요구하며 교무위원들의 퇴근을 막습니다.
⑦ 결국 그들은 계단에서 꼼짝못하는 신세가 됩니다.

밖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학생들도 독하지만 교수들도 꽤나 독합니다. 학생들은 어리석지만 교수들은 교활합니다. 학생들은 현명하게 행동하지 못해서 빌미를 만들었고, 교수들은 타협을 거부하며 일부러 일을 키웠습니다(아무리 봐도 그들은 이미 이 일을 이런 쪽으로 써먹을 생각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왠지 91년 정원식 총리 계란 투척 사건이 생각납니다.).

일단 하나는 확실합니다. 고려대 병설 보건 전문대 학생들은 버림 받았습니다.
이번 사건에 걸린 문제는 딴 것도 아니고 ‘총학생회 선거 투표권’입니다. 그런데 그것조차 인정못해 준다는 겁니다. 심지어 이번 출교조치를 비롯한 징계 조치에 그들은 고대학생이 아니라고 징계 대상자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고려대 학생에게 버림받았습니다. 모두 다-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밖으로 드러난 것만 보자면) 고대생들은 “감히 2년제 전문대생들이 통폐합됐다고 4년제 고대생들이랑 동일한 권리를 누리려 드는가?”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졸업 무사히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학교의 의무는 다했다는 겁니다.

상당히 몰염치한 사람들이네요 🙂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통폐합 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구성원과 역사도 함께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일정부분 배려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과정에서 희생된, 상대에 대한 사회적으로 갖춰야할 예의입니다. 아니면 상대방의 사회적 역사를 말살-시키고 싶은건가요? 🙂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나쁘든 좋든 학교는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입니다. 그런 공동체가 갑작스럽게 ‘폐지’된 상황이 된다면, 그리고 그런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보건전문대 학생들은 아마 격렬하게 반발했을 겁니다. 그런데 약삭빠르게 ‘통폐합’이라고 둘러말해놓고, 이제와서 그들을 인정할 수는 없다고요?

에라- 사람이 그렇게 사는게 아닙니다.

학생을 길들이고 있는 대학당국

그런데 지금 학생들이 악수를 하나 두었습니다. 그리고 고대는 출교라는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덕분에 고려대 당국은 살맛이 날겁니다. 등록금 문제도, 통폐합된 학생들의 투표권 문제도, 모두 저멀리 안드로메다로 넘어가 버렸습니다. 갑작스럽게 모든 논쟁은 ‘출교 조치’에 집중되어 버리고 있습니다. 아싸-

이제 고대는 출교 조치를 철회하든, 그렇지 않든, 확실한 이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출교 조치를 철회하면, 고려대의 아량-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골치아픈 운동권 학생들을 한꺼번에 학교에서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 그리고 어찌되었건, 다음부터는 ‘감히 함부로’ 학생들이 교수나 대학당국에 덤비지 못할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입증했거든요. 대학과 학생과의 관계에서, 누가 절대적인 힘의 강자의 위치에 있는지.

핏- 물론 그렇다고 당신들을 존경하지도 않겠지만 말입니다.

문제는, 왜 학생들이, 돈은 자기가 다 내면서, 그런 식으로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건가-라는 거죠. 독점 기업의 횡포가 생각난다고 할까요. 사실 이런 교육 소비자-의 개념도 별로 달갑지는 않지만, 교육 소비자- 취급도 못받는, “봉” 취급 받는 학생들이 불쌍합니다. 최소한 돈을 냈으면 그 돈 만큼의 권리는 받아야 하는데, 대학생들은 자신에게 있는 권리를 행사하지 못합니다. 아니 대학에서 자신이 행사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도 못합니다. 완전히 길들여진 거죠.

지금 대학당국은 학생들의 의견을 듣지 않습니다. 등록금 결정 이전에 학생들의 의견을 물은 적이 한번이나 있었습니까? 학생 리더와 대학간의 협의 과정이 있었습니까? 여러분들의 의견에 반응을 보이긴 합니까? 아뇨. 거의 없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애들이 떼쓰는 것은 무시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오케이. 그들에게 있어서 대학생은 언제까지나 대학구성원이 아니라 “애기”입니다. 그러니 길들여지지 않으면(반성하지 않으면) 학교에서 나가라-라는 얘기가 함부로 나오는 거죠.

하지만, 아무도 대학당국의 정책 결정에 반발하지 않으면, 그 학교는 좋아질까요?
학생들의 공동체나, 학생회가 붕괴된 대학이 과연 좋아질까요? 🙂

배틀로얄보다 못한 대학

그동안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의 선택은 ‘배틀 로얄’의 설정에 가까웠습니다. 그것은 “체제에 순응하느냐, 아니면 반발을 택하느냐”입니다. 대학에 대해 비판하면 “그럼 학교에 다니지 마”라는 어이없는 대답만이 돌아오는 현실이니까요. 그런데 그 어이없는 현실이, 이제는 더 지독하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체제에 순응하여 학교를 다니느냐, 맘에 안드니 학교를 때려치느냐” 입니다.

대학생은 이제 대학에 속해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만 대학 이름과 취직에 필요한 능력을 갖췄음을 입증하기 위해 1년에 천만원에 가까운 돈을 내고 4년동안 학교를 다닙니다. 이제 학원과 대학교의 차이는 “대학 졸업장”을 받을수 있는가/없는가와 대학 의 이름값이 얼마나 있는가/없는가-의 차이에 점점 불과해지고 있습니다. … 그러니 등록금이 올랐다고 학교에 항의하지 말고, 더 많이 빼먹을 수 있도록 노력해라-같은 말들을 당연한 주장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거지요.

그렇지만, 정말로 많은 대학생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거나, 이런 생각에 동의하고 있다고 보여지진 않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이런식으로 분위기를 몰고가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하는 것입니다. 분명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고 있을,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들의 정체. … 대학당국의 언론 플레이, 그리고 언론 기사의 일방적 편들기, 취직의 어려움으로 인한 미래 불안, 대기업들이 퍼트리고 있는 ‘자본주의적 인간형’에 관한 담론들이야, 너무 뻔한 것이니 두번째로 생각하더라도, 그런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차이와 배제, 그리고 생존경쟁”의 논리를 대학사회내에서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정말로 그것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자신의 생각일까요?

에리히 프롬이 쓴 글을 인용하면서, 대강의 생각을 마치고자 합니다.

권위주의적 성격(지배-복종관계에 놓이려는 성격)의 경우, 독일인들이 히틀러로 대표되는 나치즘에 복종한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경우 1차적 속박에서 벗어난 개인이 고독을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2차적 속박을 구하는 것이다. 독일인들이 히틀러의 권위에 복종하여 그 희생이 되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신보다 열등한 사람, 즉 유태인들을 멸시하고 학대하며 욕구 불만과 열등감을 해소하려는 심리가 여기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자동 기계화의 상태로 나아갈 경우는 자아를 상실한 개인이 그 상실로 인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남들의 기대에 따라 자동 인형(주체적 판단 없이 유행이나 광고에 따라 수동적으로 소비 생활을 하는 대중들)처럼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어 행동함으로써 그들과 동질감을 느끼게 되고, 거기서 안정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안정감을 잃지 않으려 더욱더 남의 기대에 순응하게 되는 것이다.

honesty님과 미리내님의 글을 읽다가, 한번 정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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