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인간농장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스스로를 사육한다. 그리고 그 농장에서 적용되는 규칙은 우리가 가축을 키우면서 적용하는 규칙과 다르지 않다. 교배, 적적량의 출산, 품종 개량, 도태(…덧붙이자면 도축). 페터 슬로터다이크가 자신의 책에서 하는 말이다.
모든 생물은 본능적으로 ‘생존’을, 그를 통한 종의 보전을 가장 중요한 욕구로 가진다. 인간 사회도 다르지 않다. 이 사회의 목적은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인간의 행복이지만, 결국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사회를 만들고, 기술을 개발했다. 우리는 그 과정속에서 ‘휴머니즘’을 발견한다.
휴머니즘은 본질적으로 인간은 자연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모든 휴머니즘의 밑바탕에는 공동체적 상상이 깔려있다. 그리고 그것은 “같은 글”을 서로 함께 읽음으로써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 시대는 방송매체의 등장과 함께 종말을 맞았다. 현실 사회에서 인간들의 공존은 새로운 토대 위에 서 있다.
… 그렇다면 그 새로운 토대는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은 어떤 길을 택하게 될 것인가?
휴머니즘, 인간 길들이기의 도구
원래 휴머니즘은 인간을 야만의 상태에서 문명화된 상태로 만드는 것이었다. 휴머니즘에 대한 우리의 물음은 “인간의 야만성(생물로서의 인간)” vs “인간의 길들임(도덕적 인간)”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깔고 하는 질문이다. 이것은 인간성이란 고유한 본성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길들이는 미디어(수단)을 선택하고 자제력을 잃게하는 탈 억제의 수단을 포기하는 데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휴머니즘은 인간농장에서 쓰이는 인간 길들이기의 도구다.
페터 슬로터다이크가 보기에, 하이데거는 이런 인간 본질의 물음에 대한 질문에 종지부를 찍는다. 하이데거가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2천년동안 “인간 존재의 해석”들에 아무런 물음도 던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습관적으로 이해되어 왔던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라는 물음, 다시 말해 동물이지만 합리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부정한다.
우리는 동물적인 존재보다도 신적인 존재에 더 가깝다. 그는 인간을 존재의 목자와 이웃으로 규정하고 언어를 존재의 집으로 부른다. 문제는 이런 인식은, 논리상 필연적으로 인간중심적인 폭력을 옹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파시즘은 인간중심적 휴머니즘- 길들이기로서의 휴머니즘의 가장 파괴적인 예가 된다.
인간 중심적인 폭력으로 드러난 휴머니즘
그렇지만 하이데거적 사유의 끝에서 분명히 알게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인간이 동물이란 상태에서, 언어를 통해 새로운 존재의 집으로 나아간다는,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에 진입해서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된다. 인간이 집에 묶이자마자, 그 머무름의 방식이 다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그 안에서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니체가 보기에 이 세상은, 겉보기에는 휴머니즘의 영역, 그저 길들이고 훈육하는 방법으로 인간을 문명화시키는 곳이다. 하지만 진실은 그보다 깊은 곳에 있다. 니체는 인간이 과학기술 발전의 도움을 받아, 인간을 사육하는 것을 본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자기가 자신을 길들이기 시작했고, 품종개량을 위한 도태라는 사육방식을 채택했다. 그리고 미래는 대-사육자와 소-사육자들의 투쟁으로 이뤄질 것이다.
‘인간의 가축화’는 과거에서부터 이제까지 사유되지 않은 거대한 대상이었다. 인간 사회의 구성은 교육과 친교, 길들이기 등으로 이뤄진다고 생각되어 왔지만, 실제 그런 방법만으로 인간 사회는 구성될 수 없다. 인간의 역사에 인간은, 실제로는, 단순한 객체에 지나지 않았다.
기술 시대는 그것을 확장하고 포장해서 보여주게 된다. 이제 새로운 시대의 인간성은 ‘인간의 우애’만을 말하지 않는다. “인간성”이란 단어의 의미에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더 커다란 폭력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함축하게 될 것이다.
사회라는 이름의 인간 농장
현대에도 길들이는 추진력과 야수화의 추진력들 사이의 거대한 투쟁은 계속 일어나고 있다. 페터가 보기에 기술은 권력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투쟁을 낳고 새로운 문제-인간은 유전적으로 개량될 것인가, 아니, 우리가 새로운 유전자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인가, 선택적으로 우생종만의 탄생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등등-에 대한 판단을 재촉한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만든 인간 농장에서 인간이라는 ‘종’으로서의 보존과 인간을 사육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에 동의/반대를 표시하기 이전에, 몇가지 해결되지 못한 의문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농장 주인”은 누구인가. 사육의 주체는 누구인가? 인간과 인간 사회는 흘러가는가 아니면 통제되어 구성되는가? 인간은 스스로를 사육할 능력이 있긴 있는가? 그리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노골적으로 보이는 “대중”이란 주체에 대한 불신은 글을 읽어가는 내내 뭔가 불편하게 다가온다.
아직 이 사회가 ‘농장’이 아니다, 라고 말할 만한 자신은 없다. 우리가 사회 체계에 길들여지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달리 보면 그것이 야만에서 문명으로 진화해나간 방식이었으며, 우리는 인류라는 종의 역사 속에서 동물과 다르게 살아가는 방법을 스스로 만들어온 것이다. 다만 근대의 사고가 부정되어야할 지점은 하나다. 인간이 자연과는 다른, 우위에 서 있는, 신과 더 가까운 어떤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
■ 더 읽고 생각할 것
www.rightleft.net 에 실린 페터 슬로터다이크 논쟁에 대한 글들
페터 슬로터다이크, 대중의 경멸(인간 농장을 위한 규칙에 함께 실림)
엘리아스 카네티, 대중과 권력
그 밖에 과학사에 관련 몇가지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