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은 예술이다 1/3

게임패스

컴퓨터 게임은 예술이 될 수 있을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임에는 틀림없을 듯 하다. 누군가에겐 이 질문이 ‘포카’나 ‘고스톱’도 예술이다라는 식으로 들리기도 할 것이고, 또다른 누군가에겐 컴퓨터 게임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들리기도 할 것이다. 그만큼 이런 류의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새로운 매체와 예술 형식은 끊임없이 출현하고, 그 가운데 실패하는 것도 있고 대중들에게 성공적으로 인정받는 것도 많지만, 쉽게 예술이라고 부르기엔 무엇인가 꺼림직한 구석이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에 대해서 고민하기보단 이미 존재해왔던 장르의 변형된 한 부분으로 쉽게(또는 고의적으로) 이해해 버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새로운 것을 새로운 것 그 자체로 인정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어떤 고정된 틀을 통한 고정된 시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에 너무 익숙하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춤(Dance)는 비록 ‘의례’나 ‘오락’에 가까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를 통해서 ‘발레’라는 예술의 형식이 나올 수 있었던 것처럼, 모든 인간의 활동은 항상 예술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따라서 컴퓨터 게임은 예술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컴퓨터 게임은 예술인가?

이 질문은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선 가끔씩 토론되어왔던 이야기지만, 막상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 사이에선 별로 논의되어 본 적이 없는 주제다. 불행히도 이 질문에 대하여 답을 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찬성하는 의견과 반대하는 의견의 옳고 그름을 떠나, 어떤 예술적 성과가 뚜렷이 보이는 작품이 등장하여 그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예술로 인식되는 과정을 거쳤다면 모를까, 그저 새롭게 등장한 매체(?)이자 형식이고, 사람들이 많이 즐기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고 해서 그것을 쉽게 예술의 한 장르로 부를수는 없다.

게다가 우리 사회에선 컴퓨터 게임에 대하여 본격적인 미학적․철학적 성찰과 논의도 이뤄지지도 않은 상태다(솔직히 말하자면, ‘게임은 예술이다’라는 주장 자체가 말도 안되는 소리다. 영화는 예술이다, 음악은 예술이다, TV 드라마는 예술이다, 라는 식의 주장과 똑같기 때문이다. 세상에, 어떤 ‘형식’에 해당하는 작품이면 무조건 예술이란 것이 말이나 되는가? 어떤 개개의 작품이 예술성을 획득할 수는 있어도, 소설이나 미술이나 연극이면 무조건 예술이다, 라는 식의 주장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컴퓨터 게임은 예술이다!(오옷, 꿋꿋하게 주장한다…-_-;).
굳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작품 형식의 ‘장르’를 구분한 상태에서, 어떤 장르에 해당하는 작품들은 (낮은 예술, 높은 예술의 차이는 있을지 언정) 대부분 예술이고, 나머지 그 장르로 인정받지 못한 작품에 대해서는 예술 작품이 아니지만 예술성을 획득한 것(또는 예술의 경지에 다다른 그 무엇)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컴퓨터 게임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예술 작품이 아닌 것’으로 분류되거나, 단순한 놀이이지 예술의 한 장르는 아니라고 선험적으로 결정내려지고 있다. 따라서 컴퓨터 게임은 예술이다라는 주장은, 게임 역시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을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라는 주장과 동일하다(이쯤에서, DDR이나 스타크래프트 따위를 최고로 치는 컴퓨터 게임이 어떻게 예술의 한 장르로 분류될 수 있는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더 이상 글을 읽지 않아주셔도 무방하다. 분명히 이야기하지만 장르에 의해서 예술이 구분된다고 보지도 않는 입장이고, 컴퓨터 게임은 오직 그것밖에 없다고 믿는 – 자신이 해보지도 않고 자기 눈 앞에 보이는 것이 마치 전부인양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이미 진절머리가 났기 때문이다.).

물론 위와 같이 주장에는 또 하나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도대체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예술이란 무엇이고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존재하기에  가벼운 오락으로 여기는 컴퓨터 게임조차 예술의 한 장르가 될 수있다고 주장되는 걸까.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하여 답할 수 없다면 게임이 예술이란 주장은 그리 의미가 없다.

미학이 ‘절대미’의 기준을 따지던 시절에서 ‘취미’의 개념으로 넘어온지는 이미 오래되었으며, 예술은 무엇이다라는 질문에 대하여 각자의 의견이 다르고 서로가 인식하는 경향이 달라진 상황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것도 예술이다라는 주장은 기껏해야 ‘외설도 예술이다’, ‘무협지만한 소설 있으냐’라는 주장과 하나 다를바 없기 때문이다(그렇게 얘기하고말거면 이런 글을 왜 쓸까, 내가 보기엔 게임도 예술이다, 니가 뭐라든 말든 하면서 살아가면 그만인 것을.).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이기에 게임마저 예술이라 주장할 수 있게되는 것일까. 장황하게 늘어놓자면 해야할 말이 많겠지만, 논문이나 책 쓰는 것도 아니니 이 자리에선 간단하게 드는 생각만 정리하고 넘어가보자(이 정도의 글 가지고 논문이나 책쓰면 난리난다… –;). 

사전에 따르면 나온대로 하자면 예술은 “어떤 일정한 재료와 양식, 기교등에 의하여 美를 창조하고 표현하는 인간의 활동, 또는 그 산물. 문학, 음악, 회화, 조각, 연극, 영화 따위(동아 새국어 사전, 1990, 동아출판사)”라고 되어있다. 하지만 예술의 의미를 이렇게 간단하게 정의하기는 힘들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 예술적 작업을 통하여 자신의 실존의 의미를 확인하고, 더 나아가 장차 존재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간다고 이야기한다. 예술이란 인간에게 실존의 고양된 형태를 보장해 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현실의 모방에서 출발한 고전적인 예술의 의미를 지나, John keats처럼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어떤 ‘진리(또는 idea)’를 찾는 것이 예술이라고 말하던 사람들도 있었고, 질서나 조화를 나타낸다고 말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듀이처럼 예술을 일종의 경험으로 여기던 사람, 인간 내면에 대한 표현의 기술로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정의들은 예술을 커뮤니케이션의 형식, 또는 언어로까지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결국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현실모사의 원리로서 영향력을 행사해 온 “미메시스적 예술 원리”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하지만 현대의 시점에서 볼 때 위와 같은 예술의 이해는 순수한 낭만의 극치일 뿐이다. 고전적인 의미의 예술은 자본주의와 대중이 중심이 된 20세기 모더니즘의 시대에 들어와서는 훼방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전적 예술은 본질적으로 대중에게 이해될 수 없는 어려운 것이며, 따라서 고독한 운명을 홀로 짊어져야만 하는 것처럼 보여졌다. 그들은 여전히 상류층의 사치처럼 자리잡고 있었고, 대중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물러나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이 물러난 빈자리에, 대중성이라 불리는 속성을 지닌 새로운 장르들이 또아리를 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도르노는 미학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속에는 “어리석고 어릿광대 같은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고 했다. 예컨대 서커스와 같은 낮은 예술은 목적적이지 않고 고상하지도 못한 비성찰적 성격 때문에 현대 예술의 중심에 선다. 더 이상 일반 대중으로부터 존경과 경탄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예술은 현대에서 그것의 단순한 실존을 통해서 예술가의 내면화 과정을 겪게 된다. 서커스와 같은 낮은 예술을 행하는 자들, 즉 곡예사, 체조사 그리고 마술사 등이 현대 예술의 미학의 주인공으로 상승한다. 미천하고 가난하며, 익명적인 그들 삶의 상태는 현대에서 삶으로부터 위협받는 예술의 상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은 그대로 목숨을 포기하진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거대한 야망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것은 현대 예술이 갖는 실험적, 비모방적, “비목적적” 원리이며 가장 진지한 예술적 미학의 원리다. 사회에서 기득권을 포기한 그러한 미천한 예술가는 현대 사회라는 시장에 팔려져야만 하는 필연적 강요의 위험, 즉 교환 가치의 운명에서 스스로 탈피하여 상품 가치로서의 순수한 실존의 예술적 미학을 획득한다.

그러니까 자기 동일성의 위기로 특징되는 현대에서의 예술은, 자기 동일성의 위기 상황, 즉 자아분열이라는 현대의 훼손된 가치 체제 속에서 우리의 영혼, 즉 진정한 가치를 찾는다는 것이 과연 얼마만큼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풀기위해 존재한다고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루카치의 말을 빌리자면 현대적 의미에서 “예술은 이제, 그 모든 전형들이 사라진 후 더이상 현실의 모사가 아니며, 형이상학적 제 영역의 자연스러운 통일이 영원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창조된 총체성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기 규정은 총체성을 상실한 현대의 삶에서  “항상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전제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전제만이 예술이 현실 사회의 모순을 뚫고 지나갈 수 없다는 역사적 비관주의 속에서 유토피아에로의 탐닉을 정당화시키기 때문이다.

총체성이 사라져 버린 현대에서 예술의 이러한 총체성 되살리기란 과연 가능한 작업일까. 현실적으로 보여지는 현대 예술의 비참하고 무기력한 모습들은, 한편으로는 그러한 예술의 임무가 가당치 않다는 것을,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에 부여된 고전적 임무는 그들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있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징조는 현대 예술의 파편화이다. 사회 속에서 예술의 기득권 포기로 상징되는 현대 예술의 파편화는 결과적으로 현대 예술에 있어서 해석의 일방성이나 고정성이 아니라 다양성을 초래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예술성에 대한 평가는 오로지 미학적이고 규범적인 범주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치 기준을 갖게 된다. 지금까지 인간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던 신화의 늪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인간을 실질적인 역사의 주체로 만들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사고방식, 즉 목적론적이며 운명론적인 사상을 파편화하는 것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선적으로, 기존의 형식과 현실을 해체하는 방법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술이란 예술가가 자기의 경험․직관, 또는 영감을 사용하여 그것을 선택하고 정리해서 미를 창조하는 과정이라는 것. 그리고 참다운 예술의 목적은 서로 다를 수 있으나 결국 이를 통하여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교감하길 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예술 역시 순수한 관념의 세계가 아닌 현실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일반적으로 다음의 세가지다.
첫째, 예술가는 현실에서 숨쉬고 먹고자면서 살아가고 있으며 , 그의 삶과 경험으로부터 어떤 직관이나 영감을 얻는다.
둘째, 예술은 스스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에 적합한 어떤 매체를 통해서 스스로를 표현할 수 밖엔 없다.
셋째, 예술 작품은 작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이 보고 듣지 않아도 스스로 만족한다고 고집하지 않는 이상 결국 현실 세계에서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드러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현대 예술 이론의 전개를 엉망으로나마 짚어보았다. 그리고 다음 원고에선 이런 기반하에 현재의 컴퓨터 게임이 어느 수준으로까지 발전했으며, 그를 통한 예술 영역의 확장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 지 이야기해 볼 것이다.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컴퓨터 게임은 예술이다. 또는 앞으로 예술의 한 영역이 될 것이다. 그것은 현대 사회의 변화가 우리의 삶에 침투하면 할수록 분명해지는 현실이다. 컴퓨터 게임은 그것이 가진 여러 가지 특성들 – 인터랙티브, 참여와 소통, 멀티미디어적 표현 등 – 때문에 달리보면 그저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효과적인 표현력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어떤 영감이나 직관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매체로 부상하고 있다. 결코 지금 아니기 때문에 외면하고 나몰라라 할 수 있는 그런 매체는 아닌 것이다.

물론 여기서 언급되는 것들이 많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신의 생각과 많이 틀릴지도, 심지어는 잘못된 내용을 이야기할 지도 모른다(부디 그러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부디 어떤 선입관을 배제하고 이 연재를 봐주기를. 어쩌면 새로운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가능성을 주목하고 끌어안는 것, 그것이 또 하나의 진보가 이뤄지는 계기일지도 모르므로.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예술에 대한 고민과 질문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지도 모르기에.

* 2000년 3월 월간 민족예술에 연재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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