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다, 이 넓고 넓은 세계
10여년 전이었던가, 지금과는 달리 8bit Apple 컴퓨터와 MSX 컴퓨터가 개인용 컴퓨터의 주류를 이뤘던 시절, 나는 Ultima란 게임(굳이 따지자면 Series의 세 번째 이야기인 Ultima Ⅲ)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때 일기에 적어놓은 글은 단 한 문장,
‘놀랍다, 이 넓고 넓은 세계’.
Britania란 가상의 공간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부의 세계에서 불려온 Avatar가 되어 사악한 마법사를 물리치는 내용을 담고있던 이 게임은, 두 가지 점에 있어서 내게 큰 충격을 주었었다.
첫 번째는 기존의 게임에서 볼 수 없었던 하나의 ‘세계’를 그 안에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며, 두 번째는 그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과 미약하게나마 상호작용(…쉽게 말해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비록 특정 단어를 이야기하면 그에 대하여 반응하는 형식이었지만.)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 전까지 별다른 스토리없이 오로지 주어진 상황에 대하여 반복하여 적절히 대응하거나(갤러그, 인베이더, 달걀받기, 개구리 게임 등), 액션을 통해 수수께끼를 푸는 게임(야구 게임, Spy vs Spy, 가라테카 등)만을 알고 있던 내게 있어선, 이것은 혁명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어딘 가에 다른 세계가 있고, 그곳에 내가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것이 나와 Cyber space와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컴퓨터 게임, 다른 세계를 만난다는 것
다른 세계와 만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그리고 다른 삶을 만난다는 것은.
19세기 후반 이후 기술적인 발전과 더불어, 인류는 이전까지는 느껴보지 못했던 경험의 폭주를 누리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다른 사람의 입이나 책, 또는 음악이나 연극을 통하여 다른 곳과 과거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전부였다면, 20세기에는 사진과 영화, 인쇄술, 그리고 전신을 통하여 다른 곳과 과거의 이야기들을 보다 직접적이고 생생하게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결국 이전의 예술이 수행해왔던 많은 역할이 대중매체(Media)에게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현대의 예술은 사회적으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기록을 남기기 위해, 또는 즐거움이나 깨달음을 위해 존재했던 많은 예술들이 상상했던 것을 보여주고, 볼 수 없거나 느낄 수 없던 것들을 느끼기 위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아, 물론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역할도 수행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지. … 몇몇 수집가들의 콜렉션이나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예술 작품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새롭게 등장한 모든 예술들이 그렇듯, 컴퓨터 게임도 기술 발전의 직접적인 수혜자중의 하나다. 전쟁을 위해 개발(최초의 컴퓨터인 Eniac은 미 육군의 포탄 사정거리 시뮬레이션용이었다.)되었던 컴퓨터는 전쟁 이후 과학자들의 연구용(빠른 계산용.. –;)으로 이용되기 시작했고, 70년대부터 점차 사무용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때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은 용도로 컴퓨터가 이용될 것이라 예측한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처음의 의도대로 진행되는 일은 세상에 별로 없는 법. 컴퓨터 기술의 발전은 사람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고, ‘도구’로서의 컴퓨터의 활용 범위는 한계를 모르고 계속 확장되어 갔다.
그 활용 범위에 게임이 포함된 것은 생각보다 훨씬 빠른 70년대부터였다. 미 대학에서 컴퓨터와 관련된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대학생들이 심심풀이로 몇가지 고전적인(지금의 우리가 보기엔) 게임들을 만들어 연구실에서 이미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참가자들 사이에서 합의된)특정한 규칙과 (게임의 즐거움과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한)우연성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간다. 특정한 규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은 프로그래밍의 특성과 상당히 유사하며, 우연성의 문제 역시 ‘난수 발생’이라는 방법을 이용 컴퓨터에선 쉽게 해결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컴퓨터 게임이 이런 심심풀이를 넘어서 또 하나의 경험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매체로까지 성장한 것은 최근 20년간 이뤄진 일이다. 컴퓨터가 사무용 기기를 넘어서 가정용 기기로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풀 칼라의 그래픽과 사운드등이 지원되기 시작했고(칼라 그래픽카드와 사운드카드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 10년동안의 일이다.), Ultima와 위저드리, 그리고 일본의 파이널 판타지와 드래곤 퀘스트 등으로 대표되는 RPG(게임 상의 특정인물의 역할을 수행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 게임들의 등장, 미스트와 가브리엘 나이트 등으로 알려진 어드벤처 (특정한 이야기에서 주어진 질문과 퀴즈에 답하며 진행하는 방식)게임, 그리고 항공기나 탱크등을 가상으로 조종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게임등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컴퓨터 게임은 급속히 발전했다.
기술은 예술을 요구하지 않지만, 예술은 기술을 요구한다
새로운 기술의 발달이 반드시 예술 형식 새로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예술 형식은 대부분 기술의 발달이 뒷받침되어 존재한다. 시간의 한 순간을 포착하여 남기고 싶다는 인간의 꿈은 19세기 옵스쿠라라는 최초의 사진 기술을 낳았고, 인간의 의지는 이 기술을 이제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사진기와 영상 기술로 발전시켰다.
그렇다면 컴퓨터 게임은 과연 컴퓨터의 발전이 낳은 새로운 예술 형식이 될 수 있을 것인가? 20세기는 분명 대중예술의 시대였으며, 이는 각각의 영역을 분담한 집단 작업이 그 특징이었다. 대규모의 자금이 소요되는 대중예술은 몇가지 분명한 폐해를 지니고 있다. 첫 번째는 그 전달 방식이 일부에 의해 만들어져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수직적’인 소통 방식이라는 것이며, 두 번째는 다수의 불균등한 대중을 철저히 ‘대상’ 또는 ‘소비자’로 전락시켜버린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컴퓨터 게임은 대중매체의 예술보다 훨씬 나은 장점이 있다. 그것은 게임이란 형식 자체가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 스스로 직접 참여하여 풀어나가거나 만들어 나가야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컴퓨터 게임은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결코 뛰어난 동영상이나 음악, 그래픽, 스토리만으로 대중의 눈을 끌 수는 없다. 그 게임을 하고있는 시간이 즐거워야만 제대로된 게임으로 평가받는다.
즉, 게임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의 과정을 즐길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예술매체들과는 달리, 작가와 소비자간의 어쩔 수 없는 간격을 넘을 수 있게 해 주는 힘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이제까지 말해지는 민중성 같은 개념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성격이 되겠지만.
독립성과 자유, 그리고 비판정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컴퓨터 게임이 아직까지 독자적인 매체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일단 컴퓨터 게임을 만들기 위해 너무 많은 전문성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는 자본과 사회의 질서에서 아직 자유롭게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달리 말하면 컴퓨터 게임을 만드는 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대중’을 얻기 위하여 작가의 독립성과 자유, 그리고 비판정신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그 안에서 각 분야를 맡고있는 개개인이 어느 정도 독창성이나 예술성을 발휘할 수는 있지만, ‘대중성’을 얻기 위해 발휘할 수 있는 예술성의 제약과 집단 작업으로 이뤄지기에 받는 제약은 아직 순수한 예술로서의 게임을 이야기하기엔 시기상조라고 말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된다. 예술로서의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아직 작품이 없는 상태, 수차 반복되어 지적되는 현재 컴퓨터 게임의 상황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기술은 계속 발전되어가고 있다. 대중성이 예술성과 완전히 대립될 수 없으며, 또한 집단 작업이 꼭 한 개인의 예술성을 한계 짓는다고만 볼 수 없다고 한다면, 기술의 발전은 점점 게임이 예술로 성장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점점 현실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다음 글에서 다룰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들 속에서 현실의 게임이 도달해있는 지점과, 앞으로 나가야할 방향을 짚어보는 것. 그리고 그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젊은 창작자들과 그들의 작품을 살펴보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