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뱅이 얼리어답터에게 축복을!

나는 게으름뱅이 얼리어답다

나는 게으름뱅이 얼리어답터다. 새로운 물건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물건을 가지고 싶고, 신기한 물건이 나오면 사용해 보고 싶으며, 어지간한 디지털 기기는 남부럽지 않게 다룬다고 자부한다. 보통 사람들보다 많은 제품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에 따른 시간과  비용 씀씀이도 상당하다.

하지만 나는 얼리어답터는 아니다. 나는 게으름뱅이 얼리어답터, 레이지어답터다. 그리고 그 차이는, 제품을 구입하기 위해 소비하는 시간과 제품의 활용도, 가격대 성능비를 따지는 태도, 가볍게 드러나는 삐딱한 시선에서 결정된다.

… 그리고 솔직히 이야기 하자면, 대한민국에서 얼리어답터라고 불리는 사람의 절반 이상은 레이지어답터다.

레이지어답터는 얼리어답터가 아니다. 우리는 얼리어답터처럼 살고 싶지만 그렇게 살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며, 남들과 다른 상품을 가지기 보다는 그 제품의 가격대 성능비와 내재적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다.

얼리어답터가 새로나온 제품을 가장 먼저 소비하는 5%에 속하는 집단이라면, 우리는 얼리어답터가 판단한 정보를 가지고 구매 여부를 결정하는 20%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새로 나온 따끈한 신제품이나 새끈한 새 것을 써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우리가 구입하는 물건들은 새 것 같은 중고이거나, 처음 나왔다가 다시 개량되어 나온 후속 제품들이거나, 비슷한 성능을 가지고 있지만 브랜드 가치가 밀리는 2등 회사의 제품이다.

레이지어답터 – 시간이 걸리는 사람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시간이 걸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중고 장터 게시판에서 하루종일 죽치고 앉아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제품의 성능에 대해 꼬치꼬치 따져묻는 사람들이기도 하며, 한 제품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최대한 끌어내어 사용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레이트어답터(late adopter, 후기 수용자)들처럼 하나의 물건을 몇 년 동안이나 사용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하다고 느껴지거나 가끔씩 “필이 꽂힌”다면 큰마음 먹고 “지르기”도 한다. 다만 일부러 한박자 늦게 유행을 쫓아갈 뿐이다. 

물론 누구나 그렇듯이, 그 “필요성”이란 것이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내가 제품을 원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내가 제품을 사면 꼭 더 좋은 제품이 나온 다는 것을, 사람은 항상 “지르고”나서 후회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레이지 어답터의 또 다른 특징은 가벼운 삐딱함이다. 매니아나 헤비유저들과 결정적으로 구분짓는 차이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2등 제품을 선호하지만 한 브랜드의 추종자는 아니다. 상품의 독점과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은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윈도우즈 대신에 리눅스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큰 흐름 속에서 조금 다르게 튀는 것을 즐길 뿐이다. 인텔의 CPU 보다는 AMD의 CPU를 선호하고, 소니의 브랜드 파워보다는 아이리버의 편리함에 반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어쩌면 메스티지(mass + prestige, 저렴한 가격에 감성적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제품을 원하는 사람들)라는 말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레이지어답터에게 축복을!

하지만 이들만큼 까다로우면서도 우습게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을까? 사실 회사나 판매처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들은 상대하기 어려운 손님들이다. 자신이 쓰고 있거나 쓸 제품에 대해서 가장 냉정하게 평가하는 소비자들이기도 하며, 아니다 싶은 것에는 심할 정도로 딴지를 거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최근 몇 년동안 불었던 인터넷 소비자 운동의 주도 세력이기도 하고, 실제로 시장을 움직이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입소문을 내는 진원지가 얼리어답터라면, 그것을 검증하고 세상에 널리 전파하는 사람들은 바로 레이지어답터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세상에서 엄청난 오해를 받고 있다. 많은 회사들은 5%의 얼리어댑터와 나머지 소비자들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얼리어댑터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면 성공적으로 제품이 판매될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진실은, 우리들은 결코 얼리어답터를 따라가는 수동적인 사람들이 아니며, 레이지어답터야 말로 세상의 주류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요즘처럼 상품 홍보를 대신해주는 얼리어댑터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더욱 더.

자- 혹시 이 글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는 않은가? 이건 나랑 비슷하네-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당신도 분명한 레이지어댑터다. 사고 싶은 것은 많은데 돈은 없는 당신, 틀림없는 레이지어댑터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가 만들어 간다. 그러니 절대로 기죽지 말고, 저 사람들은 물건도 사고 뭐도 하고 뭐도 하는데 나는 못한다고 속상해 하지 말고, 당당하게 어깨를 펴자.

자고로 만나는 순간보다도 기다리는 순간이 더 즐거운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우리는 정보를 모으고, 중고 장터에 앉아서 기다리고, 그리고 쓸수 있는 만큼 그 물건을 사용해 보는 즐거움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이 세상 모든 레이지어댑터들에게 축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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