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혜인, 이정숙, 죽음에 대한 두 가지 기록

이 글은 두 사람의 죽음을 지켜본, 두 사람이 쓴 글을 담고 있다. 하나는 10년전, 1996년에 분신한 황혜인이고, 다른 하나는 1999년에 주한미군에게 살해된 이정숙이다. 붙여진 링크는 대략적인 사건 소개만 담고 있으니 중요하진 않다.

대신 하나만 부탁드리고 싶다. 부디 끝까지 읽을 분들만 이 글을 읽어줬으면 좋겠다.



혜인이를 보내고 이제 글을 쓴다..

아이디 hwhyi 비밀번호  9541985 혜인이의 나우누리 아이디다. 이 아이디로 들어가보니 아직도 확인이 안됐단다.  이녀석 게으름을 피웠구나 싶다.  대략 열흘쯤 되었나? 혜인이를 앞에 두고 정보화시대의 진보운동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나는 결국 혜인이를 꼬셔서 자기 아이디를 만들게  했다. 그러나 약효가 약했나? 아이디는 개설했지만 그놈은 끝까지 확인작업을 하지 않았다.

그날은 날씨가  참 좋았다. 총학생회의  당선이후 정신없었던  일정이 어느정도 정리되고 오래간만에 즐기는 한가함의 기쁨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이해하기 어려우리라. 그  전날 저녁 늦게까지의 확대운영위에서  결정된 여러가지 사안이 나의  어깨를 짖누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여유가 생겼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오래간만의 깊은 단잠을 즐길 수 있었고, 그렇게 오래동안 자고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여유를 즐길수도 있었다.

아침 수업을 듣고 학생회관  식당으로 발길을 옮기던 나는 오래간만에 동기친구 하나를 만났다.  이 녀석 복학했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그녀석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 녀석과는 정말 오래간만에  함께 밥을 먹는 것이라 신변잡기식의 얘기라도 많은 말을 할  수 있었다. 점심을 마치고 그 녀석과  헤어진 나는 총학생회실로 발길을 돌렸다.  학생회관 2층으로  올라가니 매케한 냄새와 뿌연 연기가 가득차 있었고, ‘화재다’라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연기를 따라 3층에 올라가니 많은 사람들이 웅성대는 가운데 서있었다.  그 때, 한 사람이 ‘안에 사람이 있다’라고 소리를 질렀고, 나는 본능적으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아마도 그렇게 시신을 가까이서 본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매케한 연기와 소화기 분말가루가 가득찬 곳에서 나는 ‘그녀’를 보았다. 이목구비를 알아보기 어려울정도로 엉망이 되어버린 그녀의 시신은 마치 민둥산과 같은 얼굴과 딱딱해  보이는 피부, 꼭 마네킨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고 더불어 왠지 섬뜻한 느낌은 나로 하여금 주춤 물러서게 만들었다. 왠지 거북스러운 느낌과 두려움에 나는 화장실을 나와야  했고, 그 때 한 용기있는 친구가 화장실로 뛰어들어가서 그녀의 손가방을 들고 나왔다. 그 친구가 손가방을 열고 신분증을  꺼내들었을 때 나는 매우 눈에 익은 사진과 이름을 확인해야 했다.

황 혜 인

나는 내가 잘못본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확인을 했다.

황 혜 인

나는 즉시 2층으로  뛰어내려와 동연방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혜인이 좀 찾아보라고 말하며 혜인이의 호출번호를 눌렀다. 한 후배가 혜인이의 강의실에 갔다오겠다고  뛰어나가고 나는 잠시 담배한대를  물고 전화를 기다렸다. 잠시후 뛰어나갔던 후배는 혜인이를  찾지 못하고 돌아왔고 전화벨은 울리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후배녀석 2명을  혜인이 자취방으로 보냈고 혜인이 자취방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끝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를 들으면서 ‘딸깍’하는 소리를 기다렸다.

벌써 3일이 흘렀다.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른다.   지금 혜인이가 학교를 한바퀴 돌고 행소문학회와 동연방에 들렸다 가는 것을 보고 있다. 그애는 지금 아빠, 엄마와 함께 속초로  내려간다고 한다. 그리고 아마도 다시는 그애를  보기 어려울 것이다.

혜인이와의 첫번째 만남이 생각난다.  학교에서  노땅소리를 들으면서 살고 있는 나는 주착스럽게도 선거운동  정책국으로 결의하고 선거운동에 뛰어  들었다. 정책국의 특성상 선본방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곳에서 숙식을  계속하며 폐인(?)생활을 하던 나로서는 간간히 드나드는  후배들(솔직히 얘기하면 꼬마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 후배들 중 혜인이는  약간 뚱뚱한 몸매에 유난히 큰 눈으로 기억이 난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혜인이는  나름대로 선거운동 기간동안 많은 사람과 사귀려고  노력했던 것 같았고, 특히 그애는 누구와도  특유의 명랑한 성격덕분에 쉽게 사귀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좀 버릇이 없긴 했지만…

선거기간동안 혜인이는 열심히  선거운동을 해주었다. 그리고 선본의  폐인인 나는 그애와 자주 만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할 기회도 있었다. 지금 그 때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 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애에게는 생소했을 이야기, 노동해방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이야기였으리라. 선거는 그럭저럭 끝나고 방학동안 93학번-94학번들을 중심으로 95학번들을 세미나로 모았었던 것 같다. 혜인이는 정말 많은 것을 방학동안 배운것 같았고, 나는 방학동안 있었던 투쟁에 꼬박꼬박 참여하는 혜인이를 볼수 있었다.

동연뒤풀이 하는 데 괜히 한번 끼어들어서  나누었던 이야기들, 동연에서 힘들었던 이야기를 했던 기억들이  지금은 가물가물 하다. 단지 기억나는 것은  그 큰눈을 가지고 항상 웃으며 자기 고민을 이야기하는  어린애같은 모습이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그애의 얼굴을 볼수는  없을 것이다. 그애 자취방에서 먹었던 술도, 만들어준 안주도, 그애의 웃으면서 말하는 고민도, 그 모든 혜인이와 관련된 일도 이제는 없을 것이다.

통신망을 돌아다니며 혜인이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열사’라는 이미지는 혜인이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래서 어쩌면  ‘황혜인 열사’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다소 기이한  감정이 들곤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혜인이는 살아남은 나에게 큰 빚을 남겨주고  갔다. 아마도 평생동안 이 빚을 갚을수 있지는 모르겠다.  혜인이가 바랬던 노동해방은 언제쯤 이루어질 수 있을지….. 이제는 이글을 정리해야 겠다.  
나는 절대로 혜인이를 잊지 않을 것이다.

바로 옆에 있었으면서도 후배의 마음도 제대로 못본 cho12


남은 하나의 이야기는, 이정숙에 관한 글이다. 숨결이란 곳에 올라온 것을 나우누리 여성동호회에서 다시 퍼왔다. 그래서 누가 적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언니의 죽음

학교에서는 교육투쟁에, 이곳 열린광장에서는 강간범 사살 사건에 매몰되어 현재 별다르게 주목받지 못하는 사건이 있다. 또다른 주한미군 범죄. 우리는 한미행정협정이라는 불평등 협정에 의해 수사권도 확보 못한 불행한 나라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나를 가장 먼저 치고 들어와 아프게 하는 것은 나와 같은 한 여성이 일생의 대부분을 억압적인 성관계에 묶여 지내다가 최후마저도 비참하게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이 비뚤어진 사회 구조의 바퀴에 짓이겨진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 부끄럽다.

아니, 사실 나는 이런 말을 할 자격도 아무것도 없다. 나는 항상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데에 조심스러워왔다. 내가 함부로 매매춘 여성과 같은 여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을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건간에) 단지 나만의 착각이 아닐는지. 그 사람의 삶이 어떠하다고 규정지을 수 있는 그 어떤 권리도 나에겐 없다. 모두에게도, 심지어는 운명도, 생명을 내려준 절대자라는 게 있다고 해도 그것도 침묵해야 한다.

언니는 언니의 모든 것을 가져야 한다.
나는 단지 언니를 기억하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잊지 않도록 노력할 뿐이다.

정숙 언니를 처음 만난 것은 작년 5월, 동두천으로 기지촌 활동을 갔을 때였다. 활달하고 호탕하며 무척이나 친근하게 다가왔던 언니… 아직도 언니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우리들이 마음에 들었는지 돈을 턱 주며, 닭발을 사오라고 하던 언니. 사온 닭발을 능숙하게 요리하면서 나중에 식당 냈으면 좋겠다고 하던 언니. 매매춘 여성이라는 내 생에 있어 가장 이질적이었던 단어에 몸둘 바를 몰라 하던 내게 언니는 공기같이 자연스러웠고, 스스럼없이 친근했다.

같이 닭발을 요리하면서 닭 발톱을 칼로 턱턱 내리치는 내게,  “야아, 너 닭 발톱 자르는 거 잘하는구나아.”하며 껄껄 웃던 언니. 언니가 한 닭발 요리는 내가 먹어본 것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 그러나…난 다시는 닭발을 먹을 수 없을 것이다.

언니가 우리에게 자신이 몇살로 보이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나이 어림에는 자신이 없기 때문에 보이는 대로 솔직하게 39살로 보인다고 말했다. 속으로는 ‘음, 나이 많게 말해서 언니 속상해하면 어쩌나, 왜 난 거짓말도 못하나,’하고 후회하면서. 같이 간 친구들도 대개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말했다. 그러자 언니는 갑자기 얼굴이 밝아지면서, 실은 지금 너네들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다고 하셨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물을 그렁이며  “다른 남자들도 너네처럼 봐주면 얼마나 좋으냐…”
내 기억속의 정숙 언니는 언제나 젊고 발랄하다.

아프다.

정숙 언니는 장난을 좋아했다.
같이 온 친구들 가슴을 만지며 애들이 화들짝 놀라는 것을 즐거워했다.
우리도 처음엔 내숭처럼 놀라기만 하다가 나중에는 같이 만지고 노는 분위기로..
나는 너무 즐거워서 언니를 꼭 껴안고 놓지 않았다.
아, 아직도 그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야아가 와 이래?”하면서도 슬며시 웃으시며
나를 같이 안고 그 팔에서 힘을 풀지 않으셨다.
그리고..그게 마지막이었다.

새벽 강의가 끝나고 동아리방에서 자고 있을 때
선배 언니가 침통한 얼굴로 나를 깨웠다.
언니가 미군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했다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떤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애쓰면 애쓸수록 희미해지려고 하는 잔인한 내 기억을 붙잡고
단 하나라도 언니를 놓치지 않으려고 언니와의 일들을 토하고 있다.

나는 너무 늦었다…내가 너무 늦었다…
집에 가는 길에 전철에서 내내 통곡하고 집에 와서도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오늘 발인이 있었고 화장터에서 언니는 가루가 되었다.
경찰에서는 언니가 침대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하고 대충 수사를 얼버무리려고 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
언니의 억울한 영혼은…
정숙 언니가 지금 너무 보고 싶다.
내 자신이 증오스럽다.


사람이 죽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전태일의 죽음을 통해 이 나라가 변했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착각이다. 세상을 바꾼 것은 그의 죽음을 가슴 아프게 여긴 사람들이다. 그 죽음을 가슴 아프게 여겨서 세상에 뛰어든 사람들이다.

… 하지만 그것은 희생이 아니다.

누구도 한 세대에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닥치면 다 하게 되어있는거지, 처음부터 희생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없다. 지난 세대는 그저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살았을 뿐. 자신이 살아가야 한다고 믿는 삶을 살았을 뿐. 다행히 그런 사람들이, 이 나라에는, 꽤 많았다. 그래서 우리는 “맞는게 무서워서 죽을 때까지 뛸 수 밖에 없었던” 시대에서 그나마 조금 일찍 벗어날 수 있었다.

이야기가 많이 돌아갔다.
이 글에는 내가 가지고 있던, 두가지 죽음에 대한 기록을 담았다. 몇 년 지나지 않았지만, 아마 지금쯤은 거의 잊혀져 버렸을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이렇게 죽음에 대한 기록을 올리는 이유는, 죽음을 TV에 비친 어떤 ‘사건’이나 남의 이야기-로만 보지 말아달라는 이유에서였다.

사람들은 아는 사람 아니라고, 너무 쉽게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한다. 가벼이 “열사는 아니잖아~ 경제 망쳤데메~”라는 식으로 딴지를 거는 것도, “그 사람이 죽었는데 우리는 왜 흑흑..(과거 내 자신의 이야기였다.)”하는 것도, 모두 죽은 다음의 결과만 주목하지 그 사람이 “죽기전에 살았던 삶”에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같다(은하님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살아있었던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이 글은 부탁이다. 어떤 이의 죽음과 마주쳐야만 할 때, 나 모르는 사람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아닌, 나와 같은 세상을 살고 있었는 어떤 ‘사람의 죽음’으로써 봐달라는 것. 그런 부탁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쓴다. 

서로가 “공감”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로보트와 다를 바가 없어지니까.

은하님의 「개인의 희생 거부하는 세대」에서 트랙백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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