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마지막 날에 – 앨런 라이트맨

1907년 9월 2일 세계에 종말이 닥친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베른에서도 다른 도시나 시골과 사정이 다를 것이 조금도 없다. 종말이 닥치기 한 해 전에 학교는 문을 닫는다. 미래에 대해 배울 까닭이 뭐가 있나? 남은 미래라 해 봐야 아주 짧은데. 수업이 영영 끝나 신바람이 난 아이들은 크람 거리에서 숨바꼭질도 하고, 아르 거리를 달리면서 강에다 돌멩이를 던지기도 하고, 박하사탕과 눈깔사탕에 동전을 죄다 쓰기도 한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둔다.

종말이 있기 한 달 전에 모든 업무는 마감된다. 연방의회는 회의를 중지한다. 스파이허 거리에 있는 전화국 건물은 침묵을 지킨다. 라우펜 거리에 있는 시계 공장도, 니데크 다리 건너에 있는 제분소도 마찬가지다. 남은 시간이 거의 없는데 장사며 공장이 다 무슨 소용인가?

암타우수 거리에 있는 노천 카페에는 사람들이 앉아 커피를 홀짝이면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 느긋하게 이야기한다 일종의 해방감 같은 분위기가 감돈다. 예를 들면 지금이 순간 갈색 눈의 여자가 어머니에게, 자기가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봉제공으로 일했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지낸 시간이 거의 없었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제 어머니와 딸은 뤼세른으로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운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낼 작정인 것이다. 다른 테이블에서는 한 남자가, 밉기 한량없는 그의 직장 감독이 퇴근 시간이 지난 뒤 자주 탈의실에서 그의 아내와 정을 통하면서 그나 아내가 말썽을 일으키면 해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이야기를 친구에게 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두려울 게 뭐 있을까? 그는 감독과 담판을 짓고 아내와도 화해했다. 결국 마음을 놓게된 그는 다리를 쭈욱 뻗도 알프스 산맥 위를 이리저리 무심하게 바라본다.

마르크트 거리에 있는 제과점에서는 손가락이 굵직한 제빵공이 반죽을 오븐에 넣고 노래를 부른다. 요즘은 사람들이 빵을 주문할 때 공손하다. 손님들은 미소띤 얼굴로 돈을 제때제때 낸다. 돈 가치가 없어져가고 있으니까. 사람들은 프리부르로 소풍갔던 것에 대해, 자식들의 이야기를 듣던 값진 시간에 대해, 오후에 나갔던 긴 산책에 대해 잡담을 나눈다. 세계가 곧 끝나리라는 사실에 아쉬워 하는 것 같지가 않다. 다들 같은 운명이니까. 한 달 남은 세계는 평등의 세계다.

종말이 있기 하루 전, 거리에는 웃음이 넘쳐 흐른다. 전에는 한 번도 말을 주고받은 적이 없던 이웃들이 서로서로 친구처럼 맞이하고 옷을 벗고 분수에서 물놀이를 한다. 아레 강에 뛰어드는 사람들도 있다. 수영에 지치면 강가 무성한 풀밭에 누워 시를 읽는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변호사와 우체국 직원이 어깨동무를 하고 식물원을 걸으면서 시클라멘과 과꽃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미술과 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과거의 직업이 무슨 소용인가? 하루 남은 세계에서 이들은 평등한 것이다.

아르베르거 거리 옆골목 그늘진 곳에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벽에 기대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훈제 쇠고기를 먹고 있다. 나중에 여자는 남자를 자기 아파트로 데리고 갈 생각이다. 결혼은 딴 남자와 했지만 여러 해 동안 이 남자를 원했고, 세계가 끝나기 바로 전 이 날에 여자는 소원을 풀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거리를 뛰어다니면서 착한 일을 하고 있다. 지난날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고 싶은 것이다. 어색하게 미소짓는 사람들은 이들뿐이다.

세계가 끝나기 일 분 전에는 다들 미술관 광장에 모인다. 남자, 여자, 아이들이 거대하게 원을 이루고 서서 손을 잡는다.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말하는 사람도 없다. 그지없이 조용해서 오른쪽이나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의 가슴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다. 이것이 세계의 마지막 일 분인 것이다.

완전한 침묵 가운데 꽃밭에 있는 붉은 용담 꽃자루 밑에 불빛이 돋더니, 잠시 빛을 내다가 다른 꽃들 사이로 흩어진다. 미술관 뒤로는 낙엽송 바늘 잎이 나무 사이로 지나는 산들바람에 살며시 흔들린다. 숲속을 지나 더 뒤 쪽에서는 아레 강 표면에 돋는 물결마다 반사되는 햇살이 너울너울 비친다. 동쪽으로는 붉고 오래된 성 빈센트 성당의 첨탑이 하늘로 솟아 있다. 돌로 된 조형물이 나뭇잎의 잎맥처럼 섬세하다. 그리고 더 위로는 알프스가, 눈덮인 꼭대기가 흰빛, 붉은빛으로 번갈아 물들면서 말없이 우뚝 서 있다. 하늘에는 한 조각 구름이 떠 있다 참새가 퍼드득 날아간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이 되니 마치 모두 함께 손을 잡고 토파즈 봉우리에서 뛰어내린 것 같다. 종말은 다가오는 땅바닥 같이 다가온다. 시원한 공기가 스쳐 지나가고 몸은 무게가 없다. 말없는 수평선이 몇 킬로미터에 걸쳐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아래로, 광대한 눈밭이 이 분홍빛 생명의 원을 감싸려고 가까이 가까이 달음질쳐 온다.

– 1905년 5월 8일, 앨런 라이트맨, “아인슈타인의 꿈”에서

미리내님의 글을 읽다가, 갑자기 이 소설이 생각났어요. 특허청에서 일하는 아인슈타인이 ‘시간에 대해’ 꾼 꿈이라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쓰여진 이 소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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