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당신은 검열당하고 있다?

민족예술 1999년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지금도 당신은 검열당하고 있다?
이요훈(찬우물 시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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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할지도 모를 질문을 먼저 해보자. 당신은 당신의 머리를 누군가에 맡긴 적이 있는가? 또는 당신은 당신의 판단을 누군가가 대신해주고, 당신은 그저 인형처럼 그것에 따르기를 원하는가?

물론, 당신의 머리는 당신의 목 위에 붙어있고, 당신은 당신 스스로 생각을 하고 판단을 내릴 권리가 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미 알게 모르게 당신의 머리를 재단하고 있고, 당신을 판단하고 있고, 당신이 생각할 권리를 빼앗아 대신하여 무엇을 결정 내린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합법적’이나 ‘사회의 상식’임을 표방하고 있다면?

유감스럽게도, 이미 이런 일들은 당신이 알든 모르든 이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자행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의 ‘만화’와 ‘영화’에 대한 검열, 그리고 나우누리와 하이텔 같은 상업통신망의 검열이다.

검열이란, 누군가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 ‘무엇’을 어떤 잣대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을 말한다. 이런 검열의 형태를 필자는 크게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그 사회에 해악을 끼칠 것으로 판단되어 그 표현을 규제하는 ‘사회적 검열’이고, 또 하나는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하여 지배계급에 반대하는 자나 다른 의견을 표명하는 것들을 억압하는 ‘정치적 검열’이다.

이 두 가지 검열의 차이를 현실에서 다르게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정치적 검열’ 역시 ‘사회적 검열’로 스스로를 포장하고, 지배계급을 위한 검열을 마치 이 사회를 위한 어쩔 수 없는 검열인 것처럼 명분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통신공간은 현시기에 있어서 대안적인 매체, 새로운 소통의 창구로 불리운다. 새롭게 나타난 정보통신의 여러 가지 특징은, 이제까지 있어왔던 일방적인 소통을 거부하고 개개인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즉, 이제까지는 언론이나 정부에서 말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입장에 있었다면, 통신이란 공간을 통해서는 아무리 미약한 개개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의견을 얘기하고, 토론을 하고,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알려낼 수가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통신을 통한 표절곡들의 발견, ‘자살일기’ 란 형식으로 글을 올림으로써 재개발조합의 비리를 고발한 사건, 왕십리 철거지역에서 발생한 용역깡패들의 철거민들에 대한 성추행에 대한 고발등이다. 또한 패러디를 표방한 독설을 내뿜고 있는 딴지일보의 인기는 왠만한 현실 매체들을 능가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통신공간이 한 사회의 지배적인 권력에 ‘저항’하는 공간으로 이용되기 시작하자, 지배권력은 여전히 ‘사회적 검열’로 자신을 포장하며 ‘정치적 검열’을 하기 시작했다.

현실적으로 대한민국에서 ‘완전하게’ 자신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으며 말할 수 있는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통신공간은 그동안 그나마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았던 공간이었다. 실정법으로 규제할 근거가 쉽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지배계급은, 정보통신법 53조를 신설하고 정보윤리위원회를 만들고선, 자신들이 이런이런규정을 정해놓고 이것에 따르지 않으면 처벌할 것임을 경고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얼마전 한 통신인은 앵커 백지연의 사생활에 대한 글을 게재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으며, 재작년 6월에는 천리안 문단과 스포츠 신문에 자신의 소설 ‘시간을 찾아서’를 연재하던 소설가 이수광씨가 검찰조사를 받고 소설을 스스로 삭제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97년 한총련 출범식 때에는 한총련을 옹호하는 글을 올린 50여개의 아이디들을 이용정지 시키고 천 건에 달하는 게시물들을 무단 삭제해 버렸다. 심지어는 지나가다가 집회를 구경한 내용에 대해 쓴 글을, 집시법을 어기는 게시물이라며 삭제해 버린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한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규제는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사회적 검열’에 한해서이고, 또한 그것 역시 정부나 권력의 힘이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힘으로 자율적으로 정화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함부로 정부나 검찰이 나설 일이 아니다.

또한, ‘사회적 규제’와 ‘표현의 자유’ 사이에서 갈등을 할 경우,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표현의 자유’이다. 그것은 수만년의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이제야 쟁취한 기본적인 권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의 대법원은 인터넷의 음란물을 처벌하고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법을 ‘어른들의 볼권리’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위헌 판결을 내린 적이 있다.

얼마전 나우누리 진보통신모임 찬우물에서는 또다시 경찰의 협조요청에 의한 정보통신부의 공문으로 ID 이용정지와 게시물 삭제가 다시 자행되었다. 찬우물에서 경찰청의 ID를 보는 일은 이미 흔한 일이 되어버렸고, 사람들은 스스로 ‘빌린 아이디입니다’라는 문장을 글의 끝에 넣으며 스스로를 검열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고, 사람들은 스스로 하고픈 말에 목소리를 높이지 못하며, 통신을 뒤덮고 있는 것은 어떻게든 돈을 벌어보려는 사람들과 흥미위주의 가십들, 가치 없는 싸움들뿐이다. 그리고 이런 검열에 대한 싸움은, 기존의 온라인 시위와 서명운동, [검열철폐] 말머리 달기 운동을 넘어서, 민변을 통한 위헌 소송을 통해 현실에까지 번져가고 있다.

우습지 않은가. 자유스럽게 글을 쓸 권리를 얻기 위하여, 우리 사회에선 이미 수 십년 전에 끝났어야 할 싸움이 다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검열 당하고 있다. 또는 생각하고 주장하고 표현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 섣불리 무엇이 더 옳고 그르다고 정의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당신의 몫이다. 하지만 이제는 선택해야만 한다. 당신은 당신의 행동을 누군가가 결정해주길 원하는지, 아니면 당신의 생각과 주장대로 살기를 원하는지. 그리고 그 싸움의 결과에 따라, 이 사회가 한발자국 더 앞으로 나가는가, 아니면 다시 후퇴하는 가가 결정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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