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심리, 대중은 정말 나쁘거나 멍청할까?

▲ 굽시니스트_민희에게 中
얼마 전 ‘멍청한 미국인들”이란 동영상이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처음엔 조금 황당하기도 하고, CNNNN 이란 이름이 밑에 적혀 있는 것도 이상해서, 누가 만든 패러디나 코미디 동영상인 줄 알았다. 그런데 조사해 보니, CNNNN 이란 프로그램이 정말로 있었다. -_-; (물론 풍자 프로그램이긴 하다.) 해당 동영상은 CNNNN 2003년 9월 11일 자에 “What America Thinks of the World”이란 제목으로 방송된 영상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정말로 미국인들이 멍청해졌다고 주장하는 책이 나왔다. 수잔 자코비(susan jacoby)가 쓴 ‘미국 비이성의 시대’란 책이다. 그녀가 보기에 현재의 미국은 영상문화가 집어삼킨 사회다. 이런 사회는 사람들을 멍청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 경향으로 몰아가고 있다. 대중들이 사회·과학·역사·문화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무지함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에 대해 위키피디아의 창립자인 지미 웨일즈는 바로 “우리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똑똑하다”라며 맞받아치긴 했지만.

무지 몽매한 대중에 대한 비판

사실 무지몽매한 대중에 대한 비판은 이미 한 세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19세기 후반은 산업화의 시대고, 산업화의 시대는 결국 대규모 공장이 세워진 것을 말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노동자가 되어 도시로 흘러들어오고, 이로 인해 도시화, 또는 도시의 대규모 화가 급속하게 진행된 시기다.

동시에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한 군데로 몰려든 사람들은 ‘대중’ 또는 ‘군중’이라 불렸다. 특별한 이해관계없이 떼 지어 모인 ‘대중’이란 존재는, 이전에는 거의 경험해 보지 못한 현상이었다. 베냐민이나 보들레르가 대규모의 군중이나 도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도 그런 이유다.

동시에 그들은 상류계급에겐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대중은 무법자와 같았고, 실제로 수많은 범죄와 소란을 일으켰다. 게다가 강력한 대중운동은 귀족주의 정치를 점점 몰락하게 만들고 있었다. 18세기 말부터 이어진 혁명과 파리 코뮌(1871년)을 경험한 프랑스 상류계급들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마르크스는 이런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사회의 중심축이 될 것이라고 본 반면, 콩트 같은 사람들은 이들을 질서와 법으로 다스려야만 한다고 믿었다.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The CROWD: A Study of The Popular Mind)’는 그런 맥락 속에서 읽혀야만 한다. 이 책이 쓰여진 시기(1895년)는 프랑스의 한 시기를 휩쓸었던 혁명과 공화정, 나폴레옹 제정이 무너지고, 파리 코뮌이 실패한 이후 유입된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노동조합 운동이 활성화되고 아나키즘과 사회주의가 유행하던 무렵이다. 결국 구체제가 대중운동에 의해 분쇄되어가던 상황에서 씐 책인 셈이다.
이 책 전체를 통해 르 봉이 대중을 그렇게 경멸하고, 뛰어난 개인을 칭송하며, 대중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영국을 계속 칭찬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 책에서 르 봉은 대중을 충동적이고 흥분을 잘하며, 분별력이 없고 능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이성이 아닌 감정으로 움직이고, 여자/야만인/어린아이와 같은 진화의 열등 유형(37)에 속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조금 더 살피면, 르 봉은 한 문명은 탄생하고 성장하고 쇠퇴하는 과정을 겪는다고 믿었고, 성장하는 문명은 자신만의 고유한 사회/문화와 그에 기반 민족성과 사상을 발전시킨다고 믿었다. 어떤 이유보다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민족성’이며, 이것은 역사적 기반을 가지고 있기에 혁명 같은 것을 통해 단숨에 뒤바꿀 수 없다고 보았다.

… 말 그대로, 우리가 이제까지 이렇게 살아왔던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렇지만 민족의 기둥인 ‘이상’의 약화는 모든 종교/정치/사회적 구조를 흔들리게 만들고, 그로 인해 인격의 약화와 행동능력의 결여 현상이 나타난다고 믿었다. 이 시기에 인간은 자치능력이 없어져 하찮은 일까지 국가의 개입을 요구하며 국가의 지시를 기다리게 된다고 말한다.

이 시기를 지나면 민족정신은 완전히 사라지는데, 그러면 민족은 고독한 개인의 무리이자 원시상태, 즉 군중으로 돌아간다(241)고 그는 생각했다. 다시 말해 군중, 또는 대중은 인간이 아직 문명화되지 못한 야만적인 상태로의 회귀이며, 그들이 저지르는 수많은 행동들은 결국 아직 미개하기 때문에 저지르는 잘못이란 것이다.

▲ 굽시니스트_민희에게 中
대중은 어째서 야만적인가
여기까지만 보면 ‘뭐 이런 황당한 인간이 다 있나’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책을 끝까지 손에서 놓지 못했던 이유는,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군중 심리’가 현재 우리 사회와, 아니 현재 대중 사회와 굉장히 많이 겹쳐서 읽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어떤 이는 ‘맞아맞아’하며 고개 끄덕이며 읽게 될지도 모르겠다. 사실 최근 벌어진 ‘광우병 사태’를 놓고 한나라당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귀스타브 르 봉이, 현재도 보이고 있는 대중의 부정적인 측면을 정확하게 짚어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대의제 민주주의 체재에서 상식적으로 납득 가지 않는 대중의 선택을 많이 보게 된다. 까놓고 말해 얼마 전 2MB의 대통령 당선이나 한나라당의 총선 싹쓸이에 대해, 과연 대중이 이성적이고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납득 가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우리가 현재 광우병 위험에 대해 보이고 있는 ‘지극히 신경질적인’ 반응에 대해 ‘이성적’이라고 말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작년에 있었던 영화 ‘디-워’ 사태나 재작년에 보여줬던 ‘황우석 사태’에 대한 몇몇 사람들의 광적인 반응은 과연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르 봉은 여기에 대해 딱 집어 얘기한다. 그건, “대중들이 미개하고 멍청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중을 야만적이라고 얘기하는 이유는 그들이 주로 ‘감정’에 휩쓸리기 때문이다. 일단 대중에 포함된 순간부터 개인은 사라진다. 그때부터 그는 이름을 가진 누군가가 아니라 ‘군중의 한 명’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때부터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분위기에 휩쓸려 판단’을 내리게 된다.
▲ 굽시니스트_민희에게 中
미개한 대중을 선동하는 방법

이런 대중을 선동하는 것은 쉽다. 대중은 감정적(충동의 노예)이고, 이 감정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미지’다. 이 이미지는 바로 ‘언어에 의해 만들어지는’ 이미지다(116). 클로테르 라파이유가 ‘컬처 코드’라는 책을 통해서 이미 드러낸 바 있듯, 어떤 단어를 내뱉을 때 우리는 순수한 사물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음식’이 ‘맛있는 것, 사람들과의 교제’라는 이미지와 연결된다면, 미국인들에게 ‘음식’은 ‘신체라는 자동차의 연료’라는 이미지와 연결된다고 한다. 최근 광우병 사태 역시 PD수첩의 방송 이후 ‘미친 소, 뇌 송송 구멍 탁, 죽음’이란 이미지와 연결되면서 반대의 불꽃이 급격하게 일어나게 된 것이 사실이다.

결국 대중을 선동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선동할 수 있는 말’을 만들고, 그 말에 의해 만들어지는 ‘이미지’를 지배하는 것에 있다. 이 이미지는 선동가의 ‘암시’에 의해 만들어지며, 만들어진 이미지는 대중들 사이에 스스로 ‘전염’ 된다. 여기서 법률이나 제도는 중요하지 않다(17). 대중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를 잃는다.
지금의 대중은 예전과는 다르다고? 훨씬 똑똑하고 현명해지지 않았냐고?
르 봉이 보기에는 ‘천만에’다. 군중 심리는 개개인이 어떤 사람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군중 속의 개인은 평상시의 개인이었을 때와는 전혀 다르다(28). 그것은 판검사 수백 명을 모아 놓거나 거지들 수백 명을 모아 놓거나 동일하다는 이야기다. 배심원 제도의 예를 살펴봐도, 일반적인 문제에 관한 집단적 결정은 결국 누가 모이냐에 상관없이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213).
환상을 만들어내는 대중
대중들 사이에서만 쉽게 유포되는 전설이 창조되는 것은 비단 쉽게 믿어버리는 데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대중의 상상력과 뒤범벅이 되어서 진행되는 동안 엄청난 곡해가 일어나는 데도 원인이 있다(44). 대중은 이성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판단한다. 몇 년 전부터 ‘박정희’가 자주 언급되는 데에 어떤 이성적인 이유가 과연 있었을까? 지난 총선에서 ‘뉴타운 공약’을 믿고 찍은 사람들이 과연 이성적으로 판단했던 것일까? 아니다. 그들은 대중이 만들어낸 ‘대중의 믿음’을 믿었다. 그들은 허구와 사실을 구별하지 못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이 가진, 자연상태에서부터 가진 불멸의 속성이다(60). 군중은 논리에 무력하기 때문에 비판정신이 전무하고 참되고 거짓된 것을 구분 못하며 …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군중이 받아들인 판단은 그들에게 강제로 부여된 것이지 논의 끝에 채택된 것이 아니다(73). 대중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어떤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이 전해주는 ‘인상’이다.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뛰어난 능력을 가진 개인 밖에는 없다.
재미있는 것은, 사실 이런 내용이 민주주의 자체의 근거에 대한 아주 오래된 논쟁과 많이 닮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한 명의 개인이 온전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없는 가에 대한 논쟁이다. 대중에 대한 비판은 항상 ‘대중이 열등하다’라는 전제를 깔고 시작한다. 광우병 관련 촛불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너희들이 뭘 알아서 나왔냐’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청소년은 어른보다 열등하다’라는 보수적 시각이 전제 되어 있음은 당연한 사실이다. ‘국민들이 잘 몰라서’, ‘과학적 근거도 없이’라는 주장 역시 ‘대중은 무지몽매하니 가르쳐야 할 대상’이라는 시각이 바탕에 깔려있다.
민주주의의 진화에 관한 다수의 문헌은, 다소 단정적으로, 민주적 질서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부유하고 교육받은 중산계급뿐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부르주아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라는 단호하지만 역사적 사실과 관계없는 배링턴 무어의 주장에 가장 확고히 표현되어 있는 관점이다(배링턴 무어,《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울프 선드호슨, “농민과 민주주의 – 산마리노 공화국의 교훈”, <녹색평론> 제98호.

https://www.vox.com/policy-and-politics/2016/12/15/13955108/fake-news-2016
인간이라는 생물의 한계
분명 인간은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서고, 논리적이라기보다는 비논리적이다. 멀리 있는 중국의 지진이나 미얀마의 폭정보다는 가까이에서 보이는 포털 사이트의 벗은 몸에 더 관심이 간다. 논리적인 주장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이미지에, 마음속의 선입견에 더 영향을 받는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르 봉이 말한 대로 ‘대중’의 ‘야만적인’ 심리가 아니다.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다.
만약 르 봉의 이런 주장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면, 결국 그것은, 우리도 아직까지 전근대적인 사고의 영향을 여전히 받고 있다는 말과 다름없다. … 응, 맞다. 이 책을 곱씹으면서 내가 깨닫게 된 것은, 나 역시 그런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르 봉의 말대로 한번 생성된 문화는, 그 사회의 정신적 헤게모니는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제도가 바뀐다고 인간의 마인드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98). 다만 인간이란 존재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대중의 문제점’으로 교묘히 돌려놓은 그의 솜씨에 감탄할 뿐이다.
사실 그런 전근대적 선입견은 아직까지 인터넷 댓글이나 블로그 글 여기저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이 원래 그렇다(93)’는 주장이나, ‘학생이나 여자나 노동자들은 뭘 모른다, 우리 밑이다’라는 생각이나, ‘쓸데없이 대학생이 늘어서 문제다(106)’라는 말이나, ‘뛰어난 지도자가 우리를 이끌면 세상이 변한다’라는 생각이나 모두 매한가지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조금씩 변해가는 사람들
18세기부터 시작된 변화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세상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혁명적 변화라는 것은 알고 보면 없을 지도 모른다. 모든 변화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까진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만들어진 변화를, 우리는 너무 쉽게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믿어버릴 뿐이다. 

르 봉이 이 책을 쓴 후의 세상은, 어쩌면 르 봉의 이야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처럼 보였을 지도 모르겠다. 유럽은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었고, 인간의 이성을 의심케하는 학살이 벌어졌으며, 기술의 발전은 자연 파괴로 이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전염병들이 발병하기 시작했으며, 세계의 8억이 넘는 인구는 여전히 굶주리고 있고, 대중이 뽑은 지도자들은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면, 최소한 한국 사회의 우리는 1세기 전보다는 좀 더 깨끗한 환경에서 살고 있고, 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있으며, 평균 수명도 확실하게 늘었다. 전염병이 돈다고 떼죽음 당하는 사람도 없어졌으며, 독재 정치는 암살과 대규모 대중 시위로 좌절되었다. 아직 대중보다 더 나쁜 특정 신분 집단의 힘(202)은 관철되고 있고, 거짓 환상을 유포하는 정치인들에게 현혹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알아내고 태클을 걸 수 있을 정도의 실력도 갖췄다.
네트워크로 이어진, 그리고 수많은 이미지 속에 단련된 사람들은, 아직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점점 이미지와 언어에 현혹되기보다는, 그 환상을 깰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가고 있다. 최소한 집단 지성이 내린 낮은 수준의 결정은 특정 신분 집단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결정보다는 훨씬 나으며, 우리는 한번 내린 결정을 수정할 수 있는 방법도, 지나친 선동과 폭력을 경계할 수 있는 지성도 갖게 되었다. 예수나 마호메트, 부처급의 위대한 인물들이 다시 살아오지 않는 한, 대중이 내린 결정은 개인이 내린 결정보다는 조금 더 낫다.
물론 꼭 믿는다는 건 아니다(…)
이미지를 읽는 자가 세상을 만들어간다
아직까지 단순 명료하고 반복되는 언어, 또는 이미지의 영향력은 매우 강하다. 하지만 그 이미지의 상관관계를 읽어내고, 이미지를 거꾸로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을 당장 ‘우리는 현명해졌다’라고 말하진 않겠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가 어떤 선입견이나 한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앞으로도 점점 더 늘어나갈 것이다. 감정 역시 부정 당해야 할 힘이 아니다. 그 자신이 지적한 대로, 감정은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며,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근원적인 힘이기도 하다.
이제는 미디어나, 어떤 누군가가 ‘말한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는 지나갔다. 미디어를 통한 내용이 ‘누군가에 의해 어떻게 반향을 일으키느냐’가 더욱 중요해진 시대로 넘어온 것이다. 예전에는 미디어가 한번 보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사라지는 것이었지만, 이제 우리는 그것을 DB에 축적해 놓았다가 검색을 통해 아무 때고 불러와 다시 검토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의외로 르 봉이 19세기 말에 지적했던 것은 여기서 잠깐 다시 빛을 발하는데, 그의 말대로 “과거에 여론을 지도했던 신문도 지금은 정부와 마찬가지로 군중의 세력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말과는 다르게, 파멸은 일어나지 않았다.
뭐,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About Author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