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동이 다음 아고라를 이길 수 없는 이유

만약 라디오가 보내는 것뿐만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을,
즉 청취자가 들을 뿐만 아니라 말하게 하는 것을,
청취자를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를 관계 속에 넣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라디오는 공적 삶에 있어서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훌륭한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될 것이다.

– 브레히트

지난 6월 4일,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백일을 맞아 “국민의 눈높이를 몰랐던 점이 적지 않다”라고 이야기했다. 한마디로 국민과 소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명박 시대를 칭송하던 보수 언론들도 ‘이명박식 CEO형 리더십’에 대한 충고 일색이다. 지나친 성과지상주의와 일방통행형 리더십이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킨 가장 큰 이유로 비췄던 탓이다.

확실히 소통의 문제는 심각하다. 시민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30년을 3개월만에 뒤로 돌린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지금 이명박 정부가 보여주는 행동은 과거의 권위주의 정권을 연상하게 만든다. 일방적인 민영화 발표, 위험 불안이 있는 쇠고기의 수입, 경쟁 지상주의로 몰고가는 교육, 한미FTA 체결에 대한 강박감, 고소영과 강부자로 대표되는 측근 정치와 낙하산 인사…

하지만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이렇게 번지게 된 것은,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참여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의 생활에 밀접한 문제이기 때문에? 386세대 부모 밑에 자라서 비판 의식이 높은 학생들이기 때문에? 월드컵때부터 광장에 나가 모이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확실히 지난 2002년 월드컵 거리 응원을 기점으로 촛불집회는 한단계 한단계씩 성장해 왔다. 2002년 미선이 효순이 촛불집회, 2004년 탄핵 반대 촛불집회, 2006년 월드컵 거리 응원은 모두 ‘인터넷’과 ‘광장’이라는 코드로 엮인다. 거기에는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위정자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교차했었고, ‘자발적 참여’와 ‘놀이 문화’라는 코드가 다시 엮여있다. … 그리고 그 바탕에는 네트워크 기술에 기반한 미디어적 전환이 존재한다.

한국 사회 미디어 환경의 전환

텍스트, 사운드, 이미지, 신체동작, 행동으로 인해 일어난 사건들을 모두 미디어라고 정의한다면, 우리는 미디어에 의해 구성된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세계는 미디어에 의해 매개된 세계다. 마뉴엘 카스텔(1)의 주장처럼 우리에게 모든 실재적인 것은 ‘상징’을 통해 전달되며, 따라서 현실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는 아무런 간격이 없다(라깡이냐…).

역사속에서 인간집단의 형성과 존재방식, 지각/감각방식은 계속 변화해 왔으며, 그 변화는 미디어의 변화를 통해 이끌어진 커뮤니케이션 형식의 변화를 통해 이뤄졌다. 변화된 인간의 존재 조건은 인간의 존재 양식을 바꾼다. 그렇지만 미디어에 의해 복잡성이 증대되거나, 미디어에 의해 인간의 변화가 강제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변화하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미디어는 인간에게 채택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집단 지성이나 웹2.0 이라고 일컫는 것도 바로 ‘정보 과잉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채택한 미디어다. 18세기 이후 엄청나게 쌓인 텍스트로 만들어진 지식, 공간편향적인 네트워크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매스미디어의 경쟁을 통해 개인이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다양한 정보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그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채택한 방식이 바로 웹2.0인 것이다.

한국사회의 미디어적 전환이 위치해 있는 곳도 바로 그 곳이다. 휴대전화의 대중적 보급과 더불어,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국가적으로 이뤄진 네트워크 인프라의 확충은 초고속 인터넷망의 대중적 보급을 낳았다. 인터넷망의 보급을 통해 한국은 커뮤니케이션 형식의 극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오마이뉴스등의 대안 언론과 디씨, 싸이월드 등의 인터넷 커뮤니티를 성장 시켰고, 메신저와 블로그, 미니홈피로 대변되는 커뮤니케이션 도구의 변화가 이뤄졌다.

… 그 가운데, 이제 한국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방식, 그 방식을 통해 만들어진 인간의 존재 조건은 그 이전과는 다르게 변화해 갔다.

미디어 환경의 전환이 새로운 세대를 낳다

플루서는 현대 사회를 원형극장형 담론과 망형 대화의 사회라고 규정한다. 원형극장형 담론은 한 가운데 정보의 중심이 있고, 이 중심이 모든 곳에 동일한 정보를 뿌리는 형태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스테레오 타입의 인간으로 만들어진다. 이 구조 속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인지하지 못한다. 반면 망형 대화는 분산적 커뮤니케이션 형태다. 이 형태는 복잡하게 보이긴 하지만, 모든 인간의 모든 정보를 수용하는 열린 회로다.

현재 한국 사회의 미디어적 전환은 이 두가지 형식의 공존과 갈등 속에 자리잡고 있다. 조중동은 원형극장담론의 중심에 있는 매체다. 담론은 기본적으로 정보를 분배하기 위한 방법이며, 원형극장담론에서는 오직 ‘정보를 보내는 사람’과 그 정보를 ‘보내는 채널’만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여기에서 쌍방향 소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시당초 정보를 전달받는 사람이 ‘이름 없는 개인’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자와 텍스트다.

반면 대화는 다양하게 존재하는 정보를 새로운 정보로 합성하는 방법이다. 망형 방법은 닫힌 대화가 아니라 열린 대화의 형식을 띄는데, 우리는 인터넷 커뮤니티와 블로그, 아고라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가 있다. 소통은 쌍방향으로 일어나며, 누군가의 이야기는 다시 가공되어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진다. 인터넷에 올라간 이야기는 인드라 그물처럼 서로가 서로를 계속 투영하는 구조를 가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텍스트가 아니라 콘텍스트다.

여기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형식을 받아들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갈리게 된다. 이번 촛불집회를 처음 이끌었던 청소년들은,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형식에서 자라난 제 1세대다. 이들은 사춘기가 되기 전부터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고, 토론을 하고, 대화를 나누며 자라난 첫 번째 세대다. 물론 새로운 형식을 커뮤니케이션 방법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모두 같은 세대다. 반면 2007년 한국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조중동을 주로 구독하는 사람들은 40대 이상의 고소득층이다. 이들은 대부분 인터넷으로 글은 읽어도 제대로 소통하거나 정보를 생산하는 것에는 미약하다.

화면을 듣고 만지는 사람들

네트워크에 기반한 커뮤니케이션 형식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르다. 그들은 글을 읽지 않고 영상을 보지 않는다. 읽고 보는 대신에 그 정보를 더듬는다.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 자신만의 맥락속에 정보를 재배치 시키며, 그를 통해 화면 너머의 세계를 느끼고 싶어한다. 손 끝의 클릭을 통해 하나가 아니라 여러개의 텍스트를 동시에 참조하며, 영상과 음악과 텍스트를 한꺼번에 받아들인다. 때로는 더듬거리며 사진을 분석하기도 하고, 영상에 나타난 여러가지 요소들을 재맥락화 시키며 뜯어보기도 한다.

정보의 배치는 망형 대화속에서 구축된다. 동영상 사이트 아프리카의 촛불집회 실황을 보면서 채팅창으로 대화를 나누고, 아고라의 게시판에선 실시간으로 정보의 공유와 토론이 이뤄진다. 많은 정보가 범람하지만, 자신들의 손으로 찬성과 반대를 누르며 남겨야할 정보와 밀려나갈 정보를 구분한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형식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사람들은, 그 형식을 받아들이고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참여는 정보 제공과 주어진 정보를 해석하고 맥락화 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동은 배제된다. 선동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정보의 반복이며, 단일한 정보를 주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커뮤니케이션 형식은 그 형식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 다시 말해 기존의 사회적 습성과 권위, 정당성, 도덕성, 정치적 이데올로기들을 크게 약화 시킨다. 다함께 같은 정치적 그룹과 광우병 대책위 같은 기존 시민사회단체들이 촛불집회안에서 권위를 획득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다. 그들이 쉽게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형식속에 뛰어들지 않는다면 이 형식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앞으로도 대접받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왜 진중권이 뜨고 민주당이 죽어도 뜨지 못하는 지를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알 수 없는 미래를 기획하는 방법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받아들인 세대와 월드컵 응원을 통한 광장의 경험은 전혀 새로운 집회 문화를 낳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존 진보진영이 극복하려고 했지만 못했던 운동권적 관성은 시민들에 의해 극복되어 버렸다. 예전에는 중앙에서 피켓을 준비해서 나눠줬다면, 2008년의 촛불 집회에서는 ‘글씨를 쓸 수 있는 빈 피켓’을 나눠준다. 6월 10일의 시위때는 아예 분필을 나눠받은 사람들이 아스팔트 도로에 자유롭게 낙서를 하기도 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주어진 가능성을 현실화하려는 세대다. 한 기자가 실수로 적은 단어는 즉시 패러디되어 현실에 등장한다. 명박산성에 대항하여 등장했던 스티로폼은 자유자재로 다시 조립되어 ‘시민산성’이 되기도 했다가 ‘명박산성 등반대’가 되기도 했다가 산성에 태극기를 꽂는 깃대가 되기도 했다. ~하면 ~하면 되고~란 노래가 괜히 유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대를 낙관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위험하다. 망적 대화는 작은 법률적 금지에도 쉽게 저지당하며, ‘시위대 사망설’등 근거없는 이야기들을 진짜로 의심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들의 정보 생산은 유희적이다. 이들에게 존재하는 것은 상호의존적인 관계망이며, 그를 위해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 누군가는 집회가 놀이냐고 하지만, 집회를 놀이로 즐길 수 있기에 낙천적이고 끈질기게 무너지지 않는다. 걷다가 경찰에게 막히면 돌아가고, 갈 곳을 모르겠으면 토론하다가, 그냥 딴 곳으로 빠진다. 자고로 노는 것 싫어하는 사람은 몇명 없다(응?).

얼굴 붉히고 씩씩대며 선동을 하는 조중동이 아고라를 이길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자고로 아는 사람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낫고 좋아하는 사람보다 즐기는 사람이 낫다-라고 했다. 기존 언론이 씩씩대고 있을 동안, 미래는 참여를 통한 유희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만들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 마뉴엘 카스텔,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 한울아카데미, 2003, p489
* 졸면서 쓰느라 좀 엉망…이네요. 아 놔.. 어쩔거야…;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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