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날마다 대량 정보를 처리해야 하는 현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책도 ‘되도록 빨리 많이 읽어야 한다’라는 일종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말하자면 ‘속독 콤플렉스’다. 독서를 즐기는 비결은 무엇보다도 ‘속독 콤플렉스’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책을 빨리 읽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책을 빨리 읽으려다 보면 자연히 빨리 읽을 수 있는 얄팍한 내용의 책으로 손이 가기 마련이다. 반대로 천천히 읽으려 한다면 시간을 들여 읽을 만한, 내용이 있는 책을 선호하게 될 것이다.
물론 무턱대고 천천히 읽으면 된다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 말했듯, 여느 일과 마찬가지로 독서에도 역시 비결이 있다. 절대 어렵지만은 않은 그 비결을 터득한다면, 독서는 그것을 모르고 닥치는 대로 문자를 좇을 때보다 더 즐겁고 의미 있는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고 인격적으로도 성장 시켜 줄 것이다.
– 히라노 게이치로, 「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리딩」, p8
1. 대학생 시절, 본의 아니게 참 많은 책을 만들었습니다. 정확히는 자료집이나 소식지였지만, 아래아 한글 워드를 이용해서 DTP 수준의 작업을 한 적이 많습니다. 그 중 영화 소모임 소식지를 만들었을 때입니다. 소식지 표지에 넣은 도형과 그 의미에 대해 한 후배에게 설명하고 있는데, 그 후배가 그러더군요.
“그래, 만드는 사람은 항상 많은 의미를 담고 만들지. 보는 사람은 아무도 생각 안 하는데 말야.”
…생각해보니, 꽤 당돌하고 까칠한 후배였군요. :)2. 사실 그렇습니다. 만드는 사람은 항상 많은 ‘장치’를 자기 작품에 넣고 싶어 합니다. 일명 ‘구성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하죠.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사진을 찍는 사람도, 글을 쓰는 사람도, 영화를 찍는 사람도 모두 똑같습니다. 좋은 작가는 “잘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잘 구성하는 사람”입니다.
잘 구성된 작품은 작품을 읽는 사람에게 많은 재미를 줍니다. 볼 때마다 새롭게 읽을거리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한번 보면서 대충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두 번째 읽을 때 뒤집어지고, 세 번째 읽을 때는 다시 뒤집힙니다.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 배경이라고 생각했던 소품들이 다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다가옵니다. 여러 번 되풀이해서 보다 보면 정말 ‘와우!’ 하는 소리가 절로 납니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 「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의 슬로 리딩」은 바로 이렇게 책 읽기를 권하는 책입니다. 독서는 책을 빨리 넘겨보면서 필요한 정보만 찾는 것이 아니라고, 읽고 또 읽으면서 새로운 즐거움을 찾는 작업이라고. 양이 아니라 질이 중요하다고.
3. 저는 이런 방법을 “책을 뜯어 먹으며 읽는 방법”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이미 즐겨 사용하는 리뷰 방법이기도 합니다. “영화 괴물에 숨겨진 숫자의 의미”, “알 포인트의 마지막, 귀신의 의미는?” 등등- 아마, 영화나 만화 리뷰를 쓰시는 분들은 ‘작품의 숨겨진 의미’를 찾는 즐거움을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 이 방법을 이미 써왔습니다. 바로, 중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말이죠. 한 작품을 읽고, 그 작품의 등장하는 단어와 문장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고, 이 작품이 어떤 상황에서 쓰이는지를지를 생각하고…
물론 학교 때 배운 것은 재미가 없습니다. 우선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 아니고, 정해진 답이 존재하기에 “즐거운 오독의 가능성”이 배제되었으며, 시험만 보면 됐기에 “내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즐거움을 앗아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히라노 게이치로는 그런 즐거움을 다시 찾자고 말합니다. 너무 ‘많은’ 정보에 휩쓸려 살지 말고, 좋은 텍스트를 몇 번이고 곱씹어 가면서 살아보자고. 그리고 그게 우리 삶에 더 도움이 될 거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가 제안하는 것이 바로 “슬로리딩”입니다.
4. 슬로리딩의 방법은 사실 별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텍스트를 제대로 읽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문장과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 것 : 그 텍스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작업입니다. 작가의 의도에 최대한 충실하고, 그의 의도에 맞게 해석해 주는 시점입니다. 모르는 것은 사전을 통해서 확인하는 방법도 권합니다. (글의 완결성)
② 그 텍스트가 나온 배경을 알고, 역사적 맥락 속에 배치할 것 : 그 글에서 빠져나와, 그 글이 어떤 상황 속에서 쓰였는지, 무엇을 말하기 위해 쓰이는지를 파악하는 작업입니다. 예를 들어 매클루언의 ‘미디어의 이해’는 월터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해럴드 이니스의 ‘커뮤니케이션의 편향’ 등의 연구를 바탕으로 쓰인 책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닐 포스트먼에게로 다시 이어집니다. 이런 텍스트의 역사적 관계망을 파악하면 텍스트가 가진 의미에 대해 많은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③ 텍스트를 새롭게 재구성할 것 : 쉽게 말해 글을 읽을 때 “아웃풋”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모든 텍스트는 현재의 맥락에 맞게 새롭게 해석될 수 있어야 생명력을 가집니다. 동시에 읽는 사람에게도 ‘아웃풋’을 염두에 두고 읽는 읽기와 그렇지 않은 읽기는 질적으로 굉장히 다른 차이를 가지고 옵니다. 아웃풋을 염두에 두고 읽는 사람은 글의 내용을 끊임없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에 대입해서 분석”하며, “정말 그럴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히라노 게이치는 블로그 글쓰기-를 그런 의미에서 권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슬로리딩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높은 가치 중 하나인 “오독력”은 바로 이런 과정에서 나옵니다. 텍스트를 읽으면서, 자기 생각에 맞게 새롭게 구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5. 물론 이 책에서 히라노 게이치로가 놓치고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지만, 왠지 일부러 슬쩍 피하면서 적은 느낌인데요. 하나는, 모든 책을 슬로리딩할 필요가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좋은 책”을 찾아서 읽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책 안에서는 잠깐 언급하긴 하는데, 가볍게 넘어가 버립니다.
문제는 영화나 만화에 비해, 읽기에 재미있으면서도 좋은 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거죠.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서 이런 슬로 리딩은 주로 작가나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귀여니의 ‘아프리카’나 ‘그놈은 멋있었다’를 슬로리딩 하고 싶으신 분 여기 계십니까?
다른 하나는, 사람은 아는 만큼만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게 핵심인데요. 자기 자신이 어느 정도의 교양을 쌓지 못했거나, 맹렬한 호기심이 없으면, ① 은 몰라도 ②와 ③ 부터는 계속 막히기 시작합니다. 여기까지 도달하려면 많은 책을 읽었거나, 아니면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인다고, 정말 좋아하는 작품을 파기 시작하면 그 작품에서 출발해 매우 많은 것을 알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에반게리온’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공부했던 그 모든 것을 생각해 보세요. 천사금렵구를 이해하기 위해 밀턴의 실낙원을 찾아 읽었던 우리가 아닙니까? (응? 그게 뭐냐고요? 🙂
무더운 여름 잘 보내고 계신것 같아 다행입니다. 슬로리딩 이전에 책본지가 오래되었단 생각만 드네요. 아마 작가 분도 그것을 알고…. (먼산)
와! 오랜만이에요! 잘지내셨죠? 저는 이제 치질(…) 수술 마무리 돼서 살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