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2. 해방 후 한반도, 우익테러,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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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스스로의 역량에 기반하지 않았던 해방은 수많은 혼란을 한반도로 불러들였다. 한반도는 식민지 해방에 있어서 다른 식민지 국가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한반도의 지배국가였던 일본이 전쟁의 ‘패전국’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패전국 일본은 한국에서 갑작스럽게 사라지게 된다. 급하게 이뤄진 지배 계급의 상실은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를 다스릴 자치의 기회였으나, 다른 한 편으로는 주변의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재편될 수 밖에 없는 불안정한 상황에 노출된 것을 의미한다.

여운형을 중심으로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그리고 그를 통해 선포된 조선인민공화국과 이에 대한 민중들의 높은 지지, 미군 주둔 이전까지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진행되었던 정국 상황은 한반도가 자생적으로 하나의 국가를 건국할 충분한 역량이 있었음을 보여준다(8). 처음 두 달 동안 이들 단체는 독보적이었다. 거의 모든 지방과 군에서 인공은 군정이 도착하는 순간까지 통제권을 행사했고, 공식정부는 비어 있거나 심각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대다수의 경우 지방 인공그룹은 임시정부 역할을 하여 행정기능을 담당했다(9).

▲ 조선민족청년단(1946.10)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눈빛, 1991,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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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 테러

하지만 45년 9월 미군정의 주둔 이후 사태는 급변하게 된다. 미군정은 처음부터 해방공간의 실질적인 주도 세력이었던 좌익을 배제시키고, 일본의 식민통치에 협력했던 관료 계층과 보수정치세력을 자신의 동맹자로 키워나갔다. 이를 통해 남한에 자본주의 체재를 세워 반공기지를 만들려고 했다(10). 이런 미국의 욕망은 결과적으로 과거 식민지 체재를 재건하고 식민지 체재에서 일하던 사람들로 다시 채워넣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내의 정치 그룹은 몇가지로 갈리게 되는데, 북에서는 소련의 군정 실시와 동시에 힘을 얻은 인민위원회와 김일성의 공산당 그룹이 실질적으로 장악한 상태였고, 남에서는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상해임시정부 그룹,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 합작 그룹,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는 남로당 그룹등과 친일파를 중심으로 하는 이승만과 한민당 그룹으로 크게 나눠볼 수가 있다.

해방정국의 이런 혼란은 서로에 대한 증오와 더불어 몇몇 그룹은 권력을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원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고하 송진우, 몽양 여운형, 설산 장덕수, 백범 김구등 당대 최고의 거물급 정치인들이 차례로 살해되었다. “해방후사에 두드러진 거물급 테러의 경우 그 범인의 절대다수가 서북 출신, 특히 평안도 출신이라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해방 직후에는 개인테러시대라고 할 만큼 걸핏하면 인물들을 암살했는데 그 소행을 좌우익으로 나누면 우익이 7할, 좌익이 3할(11)”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테러범들 중 테러의 동기가 범인 개인의 정치적 결단에 있었다기 보다도 범인들이 가장 존경하면서 따르던 웃사람의 힌트에 좌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

이 테러의 배후에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하니있다. 그것은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해방공간에서 독립촉성회 등으로 대표되는 조선인 구래의 지주계급과 지주‧자본가계급, 다시 말해 직접적인 친일파와 간접적 친일파로 주로 구성된 계급을 자신의 정치적 준거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해방공간을 휘어잡고 있던 ‘식민지 잔재 청산’과 ‘친일파 척결’의 분위기에서 좌우 어느 정치 진영에서도 배척받는 존재들이었다.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보호하기 위해 이승만은 타자의 욕망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바로 미국이었으며, 그 욕망은 앞서 말한, ‘반공’의 탈을 쓴 소련에 맞서는 반공국가를 건설하려는 미국의 전략적 요구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승만은 식민지 관료집단과도 손을 잡게 된다. 46년 1월에 임명된 중요 정책결정직의 조선인 구성에서 이런 경향은 확실히 드러난다. 경무부장 조병옥,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대법원장 김용무, 사법부장 김병로, 검찰총장 이인 등으로 군과 경찰의 핵심이 전부 이승만의 한민당 계열로 선정되었다.

억압적 국가 기구의 대부분을 친일파가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미군정하 9개 연대의 연대장이 모두, 광복군 출신은 한 명도 없는,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결국 시스템은 일제시대 경찰의 대거 충원, 일제 경찰의 관행이었던 고문과 잔인성의 상존, 경찰의 정치적 목적 사용, 우익 청년단체의 경찰 업무에의 동원 등의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특히 주목할 점은 월남인으로 구성된 우익 청년 단체다. 1948년 5.10 선거 이후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한민당과도 결별하게 되는데, 결별한 후에도 그를 뒷받침한 것이 바로 억압적 국가 기구와 우익 청년 단체였다.

우익 청년 단체는 월남인으로 구성되어 테러와 정치하수인으로 악명 높은 서북청년회, 미군정의 전적인 지원아래 첨병역할을 한 이범석 주도하의 조선민족청년단, 이승만의 산하에 있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청년단, 군소청년단을 통합한 이청천의 대동청년단, 광복군에 복무했다 해방과 동시에 온갖 암살을 주도한 염동진 주도의 백의사와 이의 후신인 유진산이 관여한 대한민주청년동맹 등으로 이들은 46년 10월항쟁 이후부터 전국각지에 걸쳐 우후죽순 식으로 생겨나 미군정의 경찰과 함께 또 비호 하에 해방공간을 암살과 살해 및 폭력으로 얼룩지게 한 테러집단들이었다. 당시 우익 청년 단체들은 미군정과 야합하여 미군정 경찰이 외부의 비판을 우려해 수행하지 못한 ‘더러운 일들’ 곧, 암살과 살해 등을 자행했다. 당시 조선공산당의 박갑동의 증언처럼 경찰에 잡혀가면 안심이 되었지만 테러단체에 잡히면 끝장이란 증언이 당시 상황을 대변한다(12).

8. 1946년 8월 미군정청 여론국이 실시한 8,453명에 대한 여론조사는 일반 시민의 선호도에서 자본주의 14%(1,189), 사회주의 70%(6,037), 공산주의 7%(574), 모른다 8%(653)로 좌익이념의 선호도가 무려 77%에 달했다(<동아일보> 1946.8.13). 또 1947년 제2차미․소공위가 열리고 있는 시점에서 우익이 주도한 6.23 반탁테러사건 이후 조선신문기자회가 7월 3일 실시한 서울시민 2,495명에 대한 가두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이러한 점은 재확인된다.(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v.5, 1973, p21~22)

9. Carl Friedrich et. al., 『American Experience in Military Government in World War II』, NY: Rinehart & Co., 1948, p369

10. 역사학 연구소, 『강좌 한국근현대사』, 풀빛, 1999, p242

11. 선우 휘, 「비애와 낙망의 초년기자시절」, 월간조선 5월호, 1986, p476

12. 김수자, 「대동청년단의 조직과 활동(1947-1948)」, 한국역사연구회, 역사와 현실 31호, 1999,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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