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1. 들어가며 : …그래도, 삶은 오래 지속된다.

* 이 글은 2007년 여름, 「정신분석과 문화」기말 페이퍼로 제출되었던 글입니다.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제주 4.3 사건을 다룬 에세이지만, 제 스스로 정신분석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지 않은 관계로 일부 수정해서 올라갈 예정입니다. 앞으로 쓸 글에 앞서 미리 4.3에 대한 제 관점을 밝히는 의미에서 이 곳에 올려둡니다. 대여섯번에 나눠 연재될 예정입니다.

* 본문 괄호안에 담긴 숫자는 각주를 의미합니다. 각주는 각 글의 마지막에 모아서 정리되어 있습니다.

시체는 말을 걸지 않는다. 그저 바라볼 뿐이다. 시체는 죽음의 순간 망막 위에 인화된 영상을 계속 간직한 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망막에 인화된 영상에 등장하는 자는 설령 시체 옆에 있다 할지라도 아직 시체는 아니다.

총살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늘어선 줄에서 이미 총을 맞은 자가 죽는 순간에 다음번 총살을 기다리는 이의 얼굴을 망막에 포착했다고 해도 그 옆모습은 역시 시체는 아니다. 또 그것은 예정된 죽음의 그림자가 운명처럼 드리워진 얼굴도, 더욱이 총살을 완전히 모면해 생기를 되찾은 얼굴도 아니다.

폭력에 대항할 가능성을 사고하려면, 우리는 바로 죽은 자의 망막에 포착된, 이 곁에 있는 사람의 얼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시체 옆에 있는 자는 항상 응시의 대상이며, 그런 의미에서 총살을 기다리는 사람들조차도 아직 결판이 난 것이 아니다. 망막에 각인된 그 영상은 나의 얼굴이자 당신의 얼굴일 것이다.

– 도리야마 이치로, 임성모 옮김, 『전장의 기억』, 도서출판 이산, 2002, p13

1. 들어가며 – 집단기억, 사회적 구성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살아남은 자는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의 관점에서는 생존자들은 진실되게 증언하지 않는다. 생존자들은 가짜 증인들이다(2)”. 레비의 관점에서 본다면 진정한 역사적 사건의 증인은 결국 ‘사건의 현장에서 사라져간 사람들’이어야 한다. 기억은 한 개인이 자신의 과거를 현재적으로 재구성하는 심리적인 현상이다. 추후적으로 재구성된 기억은 불완전하며, 하나의 사건에 대해 ‘사실을 드러내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개인적 경험’에 대한 이야기라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건을 겪은 개인의 기억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기억의 선택적 재현과 망각,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담론들이 우리와 우리 사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없이 과거로부터 비롯된 현재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은 어렵다. 역사는 “‘사실 그 자체’를 지칭한다기보다 나름의 내러티브 구성을 통해 과거를 재현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특정한 문화(3)”다.

“알박스는 특정한 집단을 이루는 구성원들 간의 의사소통과 상호작용을 기억의 ‘사회적 구성틀’로 자리매김했다. 그에 따르면, 기억이란 반드시 이러한 ‘사회적 구성틀’을 통해서만 매개되며 오직 그 내부에서만 유효하다. ‘집단 기억’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 집단 구성원들에게 자신들을 여타의 집단과 구별지우는 특수한 정체성을 제공한다. 집단기억은 집단 외부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반면, 집단 내부에서는 지속성, 연속성, 동질성의 의식을 낳는다. 그것은 집단 내의 모든 차이를 평준화하고 변화를 은폐하는 ‘전통’으로 기능한다. 집단기억이 전통으로 자리잡음으로써 개개 구성원들의 기억은 그 틀 안으로 통합된다(4)”.

하지만 집단 기억은 ‘통합’을 위해 필연적으로 억압과 배제의 장치를 작동시키게 된다. 기억에서 억압과 배제의 장치로 사용되는 것은 ‘망각’이다. “망각은 체험의 1차적인 기억을 2차적인 기억으로 통합시켜내기 위한 구성적 계기이다(5)”. 프로이트에 따르면 “억압이란 기억에 의해 조건 지어진 망각이다. 그것은 기억이 완전히 잊혀지지 않고 대신 무의식 속에서 ‘반복되도록 강요’한다. 억압된 기억은 자주 무의식적 행위로 표출되는데 그 중 일부는 정신질환의 증상을 띠기도 한다. 기억에 대한 이와 같은 ‘억압을 통한 저항’은 자발적인 기억을 저해하고 무의식적 ‘반복’의 악순환에 빠뜨리기에, 그것을 올바로 재생시키기 위해서는 인위적인 구성작업, 즉 ‘기억작업’이 요구된다(6)”.

결국 이 글에서 하고 싶은 것은 정신분석적인 틀로 집단 기억의 ‘사회적 구성틀’이 어떻게 작동했는 지를 파악하는 것이다(7). 사회적 구성틀의 작동을 파악하고 싶다는 것은, 한 사회 또는 사회의 지배 계급이 사람들에게 어떤 기억과 망각을 강요했으며, 그것은 그들의 상호 작용에 어떤 영향을 끼쳤고, 개별적 주체에게 어떤 욕망을 탄생시켰는 지, 그래서 그들을 어떤 사회적 주체로 탄생시켰는 지를 살펴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3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다. 그것은 누가 잘하고 잘못했는지, 그 시시비비를 가리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다. 사실 그에 대한 대답은 거의 나와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하나의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그 역사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삶은 결코 쉽게 분석되거나 말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든 욕망은 타인의 욕망이라 해도 삶의 기억은 온전히 개인에게 속한 것이다. 역사는 딱 잘라 편 가르며 이야기할 수 없으며, 한 사건의 결과로 남은 일들도 대단히 복잡하다. 사람들은 서로 싸웠고, 서로 죽였다. 서로 밀고했으며, 서로 돌봐줬다. 많은 전쟁과 학살의 현장에서 그랬듯, 때론 내 남편을 죽인 사람이 내 아이의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한 쪽에서는 사흘만에 몇 백명의 사람이 죽어갔는데 다른 쪽에서는 여전히 평온한 일상이 지속되고 있다. … 그래서 이 글은 에세이다. 그저 내 개인이 생각하고 그렇다고 여기는 사실에 대한 기록일 뿐이다.

2. 이상빈, 『아우슈비츠 이후 예술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책세상, 2005, p15
3. 전진성, 『역사가 기억을 말하다』, 휴머니스트, 2005, p30
4. 전진성, 같은 책, p48~49
5. 전진성, 같은 책, p69
6. 전진성, 같은 책, p70
7. 물론 프로이트의 이런 분석은 ‘개인의 심리상태’에 대한 이야기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정신분석이 개개인이 구성한 ‘심리적 구조’를 분석하는 학문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분석 작업의 틀을 ‘집단 기억의 사회적 구성틀’에 대한 분석틀로 삼아도 크게 무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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