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5. 제주 4.3 사건과 서북 청년단

▲ 2007년 2월, 발굴되는 유해들.
이들은 일명 9연대 숙청 사건에서 무장대와 내통한 혐의로 숙청당한 군인들로 알려졌다.
아마, 대부분 제주도 출신 군인들이었을 것이다.

5. 제주 4.3 사건과 서북 청년단

강정구는 이승만정권은 전횡적인 폭력을 행사하여 좌익과 합리적 우익세력까지 적으로 설정하여 이를 섬멸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물적 존재를 확립하였고 동시에 폭력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맹목적인 반공을 생활화했다고 말한다(강정구, 「한국 보수지배체제 확립의 역사적 기원 – 해방공간을 중심으로」, 진보평론 제11호, 2002).

이 과정에서 제주도에서는 4.3 사건이 발생했다. 2003년에 발간된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2003)에 따르면 제주 4.3 사건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사건이었다.

우선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계기로 제주사회에 긴장 상황이 있었고, 그 이후 외지출신 도지사에 의한 편향적 행정 집행과 경찰·서청에 의한 검거선풍, 테러, 고문치사사건 등이 있었다. 이런 긴장상황에서, 조직원의 신원 노출로 인해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에 발맞추어 지서 등을 습격한 것이 4·3 무장봉기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다. 무장대는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 산하 조직으로서, 정예부대인 유격대와 이를 보조하는 자위대, 특공대 등으로 편성되었다. 4월 3일 동원된 인원은 350명으로 추정된다.

4·3사건에 의한 사망, 실종 등 희생자 숫자를 명백히 산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우나, 전체 희생자는 약 25,000명~30,000명으로 추정된다. 전체 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6%, 61세 이상의 노인이 6.2% 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김영주, 〈’4·3희생자’ 21%가 여성〉, 대한매일, 2001.6.2.).

1948년 11월부터 9연대에 의해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강경 진압작전은 가장 비극적인 사태를 초래하였다. 강경 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4·3사건으로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는데, 대부분 이때 방화되었다. 결국 이 강경 진압작전은 생활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마을 주민 2만명 가량을 산으로 내모는 결과를 빚었다. 이 무렵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민간인들이 희생되는 사건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피해마을은 세화, 성읍, 남원으로 주민 30~50명씩이 희생되었다.

9연대에 이어 제주에 들어온 2연대도 절차를 밟지않고 인명을 앗아가긴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공개적인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즉결처분을 자행했다. 대표적인 주민 집단총살사건인 ‘북촌사건’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마을 주민 400명 가량이 2연대 군인들에 의해 총살당한 사건이다. 이 밖에 진상 조사 위원회에 신고된 자료에 의하면, 100명 이상 희생된 마을이 45개소에 이른다. 이런 강경 진압 작전의 책임자는 1차적으로 2연대장과 9연대장이지만, 보고서에서는 명시적으로 서청단원과 이승만 대통령, 미군정의 책임을 묻고 있다.

서청 단원들은 4.3사건 발발 이전에도 500~700명이 제주에 들어와 도민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고, 그들의 과도한 행동이 4.3사건 발발의 한 요인으로 거론되었다. 4.3 사건 발발 직후에는 500명이, 1948년 말에는 1,000명 가량이 제주에서 경찰이나 군인 복장을 입고 진압활동을 벌였다.

서청의 제주 파견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미군이 후원했음을 입증하는 문헌과 증언이 있다. 당시 이승만은 4.3사건 때문에 제주도의 2개 선거구가 무효화됨에 따라 선거자체의 정당성이 문제가 되고, 여순사건이 발발하여 이승만정권의 생존가능성이 국제적으로 의문시되었고, 유엔의 승인에 즈음하여 미선거구가 걸림돌이 되었으며, 김구나 김규식 등의 지도하에 통일운동이 활성화되어 정권의 정통성 상실이라는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에 초토화작전을 통하여 긴급히 4·3사건을 평정하고 재선거를 실시하여 정권기반을 강화하기를 노렸다.

실제로 이승만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1949년 1월 국무회의에서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拔根塞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발언하며 강경작전을 지시한 사실이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에서 밝혀졌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전해진 인상은 이런 공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루는 사무실에 갔더니 너도나도 경찰관이 되어 제주도에 간다고 야단들이었습니다. 이야기인즉, ‘제주도 4.3 사건을 진압하려면 사상이 분명해야 하는데 서울에서도 누가 좌익이고 누가 우익인지 구별키 어렵다. 그러니 사상적으로 믿을만한 사람들은 서청뿐이니 서청에서 경찰관을 선발한다’는 것이었지요

– 김시훈(증언 당시 74, 표선면 가시리)의 증언, 제민일보 4.3 취재반, 「4.3은 말한다」4권, 1997, p156.

이미 정권의 힘을 얻고 입법, 사법, 행정의 3권 위에 군림하던 특권부라고 불리던 서북청년단을, 미군 정보부가 작성한 특별보고서 조차도 “극우 정치인사들이 지원하는 테러조직”이라 단언한 서청을 ‘빨갱이의 섬으로 규정한’ 제주도에 대거 내려보내기 시작했다는 것은 비극을 자초하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이제 제주도민에 대한 좌/우의 구별은 무의미해졌다. 그들과 군인, 경찰은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모두를 죽였다. 같은 경찰도, 우익 단체 조직원도, 도지사도, 면사무소 서기도, 마을 이장도, 모두 특별한 재판도 없는 상태에서 죽어갔다. 그 뒤에는 변함없이 대통령 이승만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당시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승만이 우리를 이용했다고 여겨집니다. 당시 서청 문봉제 단장은 이 대통령의 신임을 받던 측근 중의 측근이었습니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공산당을 없애야 한다는 명분 하나를 앞세워 현지 사정도 잘 모르는 대원들을 대거 투입한 것입니다. 국민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집권욕만 생각한 것이지요. 이 대통령의 허락 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습니까. 이 대통령이 ‘죽이지 말라’고 했으면 제주도에서와 같은 학살사태가 있을 수 있습니까. 내가 살고 있는 가시리에서는 며칠 전에 집집마다 제사를 지냈습니다. … 아무튼 학살의 총책임자는 이승만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시훈, 같은 책, p153

물론 그들이 정말 마주친 것은 죽음에의 공포였다. 제주도는 고립된 섬이었으며, 그들은 처음으로 싸움터가 아닌 전쟁터로 내몰렸다. 그것도 월급과 식량도 주지 않고 자체적으로 해결하라고 하면서. 다만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초자아의 명령, 죽음의 공포에 직면한 상태를 즐겨라-라는 것이었다. 그 향락은 성적인 폭력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사람들의 공동체에 정해진 것, 법과 도덕을 명시적으로 위반함으로써 누구도 도망치지 못하는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은 타인에게는 지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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