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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민보단과 부인회원을 모이게 한 후 한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그 여인은 난산리 출신으로서 신풍리에 시집간 사람인데 남편이 산에 오르자 자기 친척이 있는 우리 마을에 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만삭인 상태로 와서 아기를 낳았지요. 경찰은 그 여자를 발가벗긴 후 민보단원과 부인회원들에게 창으로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총으로 쏘았습니다. 생후 한 달도 안된 아기가 죽은 엄마 옆에서 바둥거리자 경찰은 아기 얼굴에 대고 또 한 발의 총을 쏘았습니다.
– 김원형(88세, 표선면 성읍리) 씨의 증언. 4·3은 말한다 5권, p88.
둘째 오빠가 행방불명돼 버리자 우리는 ‘산폭도 집안’으로 몰렸습니다.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나까지도 토벌대에게 끌려가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옷을 벗기고 거꾸로 매달아 고춧가루를 탄 물을 코와 입에 부어 댔습니다. 입을 다물면 쇠붙이로 이빨 사이를 억지로 벌리는 바람에 이가 다 부러졌습니다. … 그들이 어머니를 죽일 적에 언니와 나도 함께 끌려갔습니다. 토벌대는 우리에게 ‘어머니가 죽는 것을 잘 보라’고 하면서 총을 쏘았습니다.
– 정순희(64세, 서귀포시 강정동) 씨의 증언, 4·3은 말한다 5권, p194
당시 친정집에는 군인 3, 4명이 임시 주둔했는데 그 중에서 ‘최 상사’라는 놈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동생은 참 예뻤지요. 그놈들은 처음에 처녀들을 몇 명 집합시켰다가 동생이 제일 곱다고 생각했는지 덮쳤습니다. 그러나 맘대로 되지 않자 총을 쏜 겁니다. 동생은 배꼽 부근에 총을 맞아 창자가 다 나올 정도로 처참한 모습으로 숨졌습니다.
– 김종민, 「4ㆍ3 이후 50년」, 제주4ㆍ3연구(역사문제연구소ㆍ역사학연구소ㆍ제주4ㆍ3연구소ㆍ한국역사연구회 편), 역사비평사, 1999, p32~33
이북 출신 경찰관 노 순경은 한 처녀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 처녀는 김용식(20)에게 시집을 갔다. 앙심을 품은 노 순경은 1949년 3월 22일 중산간 순찰 때 마침 민보단원이던 김용식과 같은 조에 편성되자 그를 총살했다. 토벌대는 또 부녀자 겁탈을 밥먹듯 했다. 한 주민은 이를 ‘처녀토벌’이라고 말했다.
– 4·3은 말한다 5권, p36.
처음엔 ‘말 태우기’와 ‘뺨 때리기’가 유명했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킨 가운데 시아버지를 엎드리게 하고 며느리를 그 위에 태워 빙빙 돌게 했다. 또 할아버지와 손자를 마주 세워놓고 서로 뺨을 때리도록 했다. 머뭇거리거나 살살 때리면 곧 무자비한 구타가 가해졌다. 심지어는 총살에 앞서 총살자 가족들을 앞에 세워놓고 자기 부모형제가 총에 맞아 쓰러질 때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
– 김종민. 같은 책, p33
난 ‘거슨새미오름’ 주변 천막에 보름을 갇혀 있으면서 고문을 많이 받았어요. 뒤로 몽둥이를 끼운 채 무릎을 꿇려 놓고 위에서 마구 밟았습니다. 지금도 잘 걷지 못해요. 난 당시 임신 중이었습니다. 임신했다고 사정했지만 통하지 않았어요. 결국 유산됐습니다.
– 차경구(1997년 당시 78세, 조천읍 선흘리) 씨의 증언, 4·3은 말한다 4권, 전예원, 1997, p321
토벌대는 큼직한 장작으로 무지막지하게 때렸어. 그러다가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모두 옷을 홀랑 벗겼지. 나는 당시 마흔한 살이었는데 체면이고 뭐고 가릴 여지가 있나. 그냥 옷을 벗으라 하니 벗을 수밖에. 토벌대는 옷을 벗긴 채 또 장작으로 매질을 했어. 토벌대는 그 일에도 싫증이 났던지 얼마 없어서 처녀 한 명과 총각 한 명을 지목해 앞으로 불러내더니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짓을 하도록 강요했어. 인간들이 아니었지. 두 사람이 어쩔 줄 몰라 머뭇거리자 또 매질이야. 그러다 날이 저물어 가자 주민 4명을 끌고 가다가 총을 쏘아 버렸지.
– 좌봉(1995년 당시 88세, 한경면 산양리) 씨의 증언, 4·3은 말한다 3권, 전예원, 1995, p82
창고 안에는 여러 마을 사람들이 갇혔는데 무자비한 구타와 함께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벌어졌습니다. 남녀를 불러내 구타하면서 성교를 강요했고 여자의 국부를 불로 지지기도 했습니다. 밤에는 그 썩는 냄새로 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습니다. 난 그들이 제정신을 가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홍경토(71세, 성산읍 고성리) 씨의 증언, 4·3은 말한다 5권, p66
군인과 서북청년단들이 처모와 사위를 대중이 모인 가운데서 정조를 맺게 하고 총살시켰다.
– 김종민, 같은 책, p33
나는 대한청년단 분대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침에 정기보고를 하러 지서에 갔더니, 남편이 입산했다는 이유로 젊은 여자 한 명이 끌려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 주임(정용철, 서북청년단 출신)은 웬일인지 총구를 난로 속에 넣고 있더군요. 그리고는 젊은 여자를 홀딱 벗겼어요. 임신한 상태라 배와 가슴이 나와 있었습니다. 정 주임은 시뻘겋게 달궈진 총구를 그녀의 몸 아래 속으로 찔러 넣었습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정 주임은 그 짓을 하다가 지서 옆 밭에서 머리에 휘발유를 뿌려 태워 죽였습니다. 우리에게 시신 위로 흙을 덮으라고 했는데 아직 덜 죽어있던 상태라 흙이 들썩들썩 했습니다. 정 주임 그놈은 오래 살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 고봉수 씨의 증언, 79세, 제주시 삼양2동 1999. 8. 28 (제민일보 보도)
주정공장 창고 부근에는 부녀자와 처녀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서청은 여자들을 겁탈한 후 고구마를 쑤셔대며 히히덕거리기도 했습니다.
– 4·3 당시 성산면 대동청년단장으로 제주도 전체에서 대표적인 우익인사 중 한 사람이었던 고성중(작고) 씨의 증언, 4·3은 말한다 5권, p69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여성의 몸에 대한 이중적인 환상 구조다. 왜 이들은 남성은 바로 사살했던 반면 여성에 대해서는 성적 희롱을 일삼았을까? 이들이 단순히 남자들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욕망의 무대가 되는 두가지 환상이 작동한다. 하나는 앞서 말한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는 환상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지배에 저항하지 못하는 “복종할 수 밖에 없는 여성”이라는 환상이다. 이들에게 제주도의 여성은 빨갱이이면서 여성인 존재였다. 이에 대해 김성례는 여성의 몸 자체가 파시즘 폭력의 정치적 기술의 환영적인 대상으로 활용되는데 특히 폭력의 대상은 여성화된 몸으로 기표화 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김성례가 보기에 4·3 사태 당시 여성들이 경험한 도착적인 성폭력은, 여성을 빨갱이 인종을 재생산하는 ‘빨갱이의 몸’으로 재현하여 상상적으로 자행된 빨갱이에 대한 인종적 증오와 테러다. 여성의 몸은 남성에게 성적욕망의 대상이면서 또한 여성의 성적욕망은 남성의 성적욕망을 자극하며 남성의 몸을 오염시키는 통제불능의 파괴적이고 위험한 실체로 인식된다.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가지는 파괴적인 힘에 대한 상상은 남성으로 하여금 성적 욕망의 대상 자체에 대한 혐오와 공포심을 유발한다. 그래서 남성은 자기방어의 메카니즘에 따라 여성의 몸을 궁극적으로 제거함으로서 자신의 건강을 지키는 폭력적 행위에 이르게 된다.
한마디로 여성의 몸은 폭력과 성적욕망의 이율배반적인 심리구조가 가시화되는 장소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빨갱이” 혐의가 있는 여성의 몸은 반공과 용공의 차이가 각인되는 몸이며 스펙타클이다. “빨갱이년”의 “열려진 몸”은 폭력 행위자에게 성적 욕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그 억압된 성적 욕망에 대한 두려움의 대상인 것이다. 억압된 성적욕망을 해소하는 방법은 욕망의 대상을 고문하거나 살해함으로서 이루어진다(김성례, 국가폭력과 여성체험 : 제주 4·3을 중심으로, 『창작과비평』 102호, 창작과비평사, 1998년 12월호).
하지만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팔루스적 주이상스는 결코 완결되는 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