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없이 산책했던 밤

초등학교 시절, 학교 갔다 집에 오면 할 일이 없었다. 학원에 다니는 것도 아니었고, TV에서 낮 방송이 나오지도 않았던 때다. 부모님은 바쁘셨고,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녁에는 밥 먹으러 오시니 어디 멀리 갈 수도 없고, 그냥 골목에 나가 돌아다니거나, 놀아줄 친구를 기다렸다. 그러다 근처 고등학교 수업이 끝나고 누나들이 우르르 몰려 나오면, 집에 갈 때가 됐네-하면서 돌아왔다.

코로나19가 유행하자, 다시 그런 시간이 생겼다. 저녁 약속이 사라지니 할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집에만 있기는 갑갑하니, 밤 산책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특별한 일이 없으면 밤에 산책하러 나간다. 나는 어딜 가든 예쁜 걸 찾아내는 것이 특기다. 덕분에 이 도시를 조금 더 사랑하게 됐다. 코로나19가 내게 선물한, 몇 안 되는 좋은 일이다.

며칠 전 눈이 오는 날에도 버릇처럼 밤 산책을 나섰다. 별일 없겠지-했는데, 눈이 오는 걸 너무 신경 쓴 탓일까? 스마트폰을 잊고 나왔다. 갑자기 불안해졌지만, 그래봤자 어차피 산책이다. 그냥 내키는 데로 걷기로 했다. 어차피 집 근처를 걷는 건데 큰일이야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눈을 맞으며 걷는데, 잘못 생각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눈도 내리고 매섭게 추운 데, 어디 들려 잠깐 쉬지도 못한다. 따뜻한 음료를 사서 마실 수도 없다. 예쁜 풍경이 보여도 사진 찍을 수도 없다.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할 수도 없다. 세상과 연결되는 도구를 잃었달까. 초등학생 때 골목을 돌아다니던 것과 다를 바 없게 됐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이 더 막막하다는 것 정도?

픽, 웃음이 나왔다. 이게 무슨 꼴이람. 평소에 글을 쓰거나 강의를 나가면, 항상 스마트 기기를 덜 써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넷은 약이 될 수도 있고 마약이 될 수도 있으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자기 주도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해놓고, 막상 스마트폰이 없으니 초등학생보다도 못하다. 어릴 적엔 아무것도 없어도 불안하지 않았다. 차라리 모르는 곳에 가서 엄마 손을 놓치는 게 더 무서웠지.

맞다. 스마트폰은 21세기의 엄마 손이다. 어디로 갈지 안내하고, 모르는 위험에서 보호하고, 항상 잔소리한다. 가끔 맛있는 것도 사주면 좋겠지만… 이건 내 지갑에서 나가는 것이 확실하고. 슬프다. 아무튼 우리는 스마트폰에 의지해 잘 모르는 도시에서 정보를 얻고, 위치를 확인하고, 대화를 나누며 살아간다.

그러고 보니 스마트폰이 유행한 지도 십 년이 넘었다. 그동안 참 많은 생활이 변했다. 좋아진 것도 있고 나빠진 것도 많지만, 돌이키기는 아마 힘들 거다. 우크라이나에 러시아가 쳐들어와도, 사람들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반대로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틱톡이 전쟁을 기록하는 도구가 됐다. 스마트 기기는 분명 삶의 중요한 도구다.

하지만 언제까지 엄마 손을 잡으며 걸을 수는 없다. 뭔가가 없을 때 불안하면 의존하는 거라고 했다. 아무리 훌륭한 도구라고 해도, 그게 없으면 불편해야지 불안해서는 곤란하다. 그럼 어쩌면 좋을까? 초등학생 조카에게 스마트폰 사용법에 대해 잔소리했던 것을, 나에게도 적용할 생각이다. 없으면 못 사는 것은 아니까, 쓸 거면 잘 쓰자고.

모든 알람을 꺼놓을 것. 보이는 것을 클릭하지 말고, 필요한 정보를 스스로 검색해 찾을 것. 필요 없을 땐 안 보이는 곳에 둘 것. 문자보다 목소리로 대화할 것. 폰이 없어도 괜찮은 정도의 실력(?)을 기를 것. 혼내지 않을 테니 숨기지도 말 것. 항상 네가 가해자가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할 것. 그리고 … 큰아빠에게 자주 전화할 것. 예, 저도 여러분처럼 조카 예뻐합니다. 무려 셋이나 된답니다.

스마트폰 없이 눈길을 걸었던 밤, 나는 좀 더 능청스러워졌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묻고, 튀김을 팔던 아저씨와 농담을 나눴다. 예쁜 풍경을 사진에 담지 못한 건 지금도 아쉽지만, 그러기에 더 좋은 풍경으로 기억될 거란 걸 안다. 마음엔 친구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쌓여갔다. 눈길에 넘어졌을 때도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을 수 있었다. 춥게 걷다 돌아온 집은 참 따뜻했다. 나름 괜찮은 밤이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내일부터는 꼭 지갑을 가지고 다닐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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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없이 산책했던 밤”에 대한 4개의 생각

  1. 뭐 알아도, 알고 있어도 뜻대로 안된다는 것이 있다는걸…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거구나 하고 느낄때가 더 많습니다. ㅎㅎ

    이렇게 덕분에 한 해 또 잘 보낼수 있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좋은 한 해셨길. 그리고 내년은 더 좋은 한 해가 되시길.. 설날에 또 드리겠지만. 미리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 종종 지갑을 놓고 출근한다거나 전화기를 놓고 간다거나 그날 먹을 약통을 놓고 출근하는 경우가 종종 생겨서 그때마다 참 곤란해서 전화기도 2개, 지갑대신 비상용으로 체크카드 하나 약도 사무실에 비상용으로 챙겨두고 그래 살고 있습니다.

    요즘은 지갑은 없어도 전화기가 없으면 참 곤란한 세상이 되어버렸죠. 아침에는 모닝콜 회사 가는길에는 라디오 사무실에서는 거래처와 소통하는 전화 메일 팩스기기 집에서는 유튜브. OTT 라디오 머신으로 활약하고 있으니.. 회사 컴퓨터를 제외하면 아마도 저랑 같이 있는 시간이 제일 오래 있는.. 그러면서도 능동적이기보단 수동적으로 활동하게 만들어주는 참… -ㅅ-;;
    여전히 14프로맥스는 카메라로 쓰고 주력은 작년에 산 갤럭시A23인데.. 가끔 렉걸려서 멈추는걸 빼면 참 만족스럽게 쓰고 있습니다.

    낭비없이 기능을 풀로 다 쓰고 있다는 그런 느낌… 최신폰이랑 비교하면 아쉬운점이 없는건 아니지만 이젠 전화기는 최신 고가의 노트북과 동급이니… 그냥 바꾸기에는 부담이 크네요… ㅡㅡ;

    연말에 스마트폰 없이 산책을 다녀오신 글에 담백함을 맛보는군요.
    올 한해도 복 많이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건강하세요!!

    1. 저도 최근에 아이폰 12 프로 맥스로 기변했습니다. 동생이 아이폰 15로 바꾸면서 쓰던 폰을 받았네요. 크고 무거워서 아이패드 미니 사용량이 늘었습니다(?). 그래도 신기한 게, 이게 나온지 햇수로 4년 정도 되는 폰인데… 너무 멀쩡하네요. 왜 새 폰을 사야하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아아, 아무튼, 댓글 없는 블로그에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여기로 이사오니 사람 얼굴 볼 수가 없어서 블로그 접어야 하나 고민중이었거든요. 글도 안올리게 되고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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