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집회 향후 전망에 대한 입장정리

나라가 올림픽 때문에 시끌벅적한데, 이런 글을 올리는 것도 조금 그렇긴 하지만, 8월 15일 집중 촛불문화제가 오기 전에, 입장을 어느 정도 정리해둬야 할 것 같아서 한번 적어봅니다. 사실 입장정리라기 보다는, 이제껏 촛불에서 무엇을 배웠고, 앞으로 이렇게 진행됐으면 좋겠다-라는 의견 개진쪽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네요.

촛불은 어떻게 진화해 왔는가

촛불은 지금까지 세번정도 큰 변화를 겪어 왔습니다. 하나는 5월 2일 ‘생각지도 못했던’ 시작에서, 5월 24일 거리 행진 및 그 뒤에 이어졌던 강제 진압, 그리고 6월초를 기점으로 광화문 차벽(또는 명박산성)을 둘러싸고 이뤄졌던 축제 문화-실천 방법 및 논쟁들. 이후 잠시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수배자를 낳게 되고, 종교계의 개입을 통해 잠시 평온을 되찾았던 기간까지. 제가 봤던 촛불의 진화 방향을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 의제 확장형으로 진화 : 촛불은 광우병이라는 단일 의제로 시작하여, 민영화 반대, 대운하 반대, 공영방송 장악 반대, 인터넷 검열 반대등 다양한 의제를 포괄하는 방법으로 진화를 이뤄냈습니다. 이는 배경에 ‘정부의 밀어부치기 행태’에 대한 반감이 동일하게 깔려있기는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 이렇게 다른 의제를 계속 포괄하며 넓어진 집회를 보지 못했습니다. 이는 촛불이 단순한 ‘항의 집회’가 아닌, 일종의 시스템이나 네트워크로 기능했기 때문입니다.
  • 자율행동으로 진화 : 예비군 부대, 시민 기자단, 의료 봉사단, 김밥 부대, 아고라 책의 발간, 캠페인의 제안 및 시민 유인물의 배포 등등- 촛불을 든 시민들은 자신이 맡아야할 역할을 스스로 찾아서 움직였습니다. 명령이 아닌 동의, 조직이 아닌 제안을 통해 이뤄진 이런 자율 네트워크는, 촛불이 100일이 넘도록 꺼지지 않는데에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 커뮤니티로 진화 : 촛불이 계속 이어지면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촛불은 구시대적 조직(상부하달식)이 아닌, 강남 아고라, 동작구 촛불 모임, 10대 연합등등의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커뮤니티로 진화를 이뤄냈습니다. 조직이 단일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면, 커뮤니티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모였지만, 모인 사람들의 ‘함께하는 일상’이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곳입니다. 같이 밥을 먹고, 정기 모임을 가지고, 봉사 활동을 하고, 영화를 보러 가는, 그런 일상이-

요약하자면 촛불은 ‘국민의 동의에 기반하지 않은’, ‘정권의 일방적 통치 행태’에 대한 저항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시민 커뮤니티(또는 네트워크)’로 진화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촛불은 이제까지 대한민국 역사에서 한번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저항을 일궈냈습니다. 하지만 종교계가 빠지자마자 이뤄진 경찰의 강경진압 재천명 및 광화문-시청 원천 봉쇄, 다수의 연행자를 발생시킨 일관된 강공책으로 인해 지금은 슬슬 다른 방향으로 전환을 모색해야할 시기가 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향으로, 어떤 방법으로 모색하는 것이 현명할까요?

8월 15일 집중 촛불 문화제를 마지막으로, 소강 상태에 들어가야 합니다.

언젠가부터 제일 당혹스러웠던 일이, 어떤 전략이나 전술이 이야기되지 않은 상태에서, 닥치고 거리 행진이나 닥치고 가두 투쟁을 요구하는 분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행동을 하는 것에 제한을 두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야만할 이유’가 없는 상태에서 ‘닥치고 거리로-‘를 주장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8월 15일 이후로, 대책위의 제안을 받아들여, 촛불은 잠시 소강상태로 들어가야 합니다. 물론 -_-; 제가 끄잖다고 해서 꺼질 촛불은 아니지요. 하지만 광우병 관련 사안은 이제 일상에서의 실천으로 넘어갔습니다. 지금 싸워야할 장소는 자신과 이웃들의 삶의 현장, 바로 그곳입니다.

그렇다고 KBS나 MBC 앞의 촛불이 꺼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곳은 더이상 광우병이 아닌, 언론탄압에 대한 촛불입니다. 당연히 그건 그대로 갑니다. 기륭 전자를 비롯, 촛불이 켜져야 할 곳은 많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나쁜 일이 터진다면, 분명히 촛불은 다시 타오를 수 밖엔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촛불이 타오를때, 촛불은 지금보다 훨씬 진화해 있어야 합니다. 촛불은 단순히 겉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시민들의 저항 네트워크로, 하나의 시스템으로 자리매김해야 합니다. 일만 생기면 촛불을 들고 나갈수 밖에 없는 사회는 무척 불행한 사회입니다. 하지만,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잘못하면 언제라도 촛불이 다시 타오른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행동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 옆의 사람의 전화번호를 따세요

그렇다면, 촛불이 잠시 소강상태에 있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별거 없습니다. 잘 놀고 잘 먹으면 됩니다. 하지만 혼자 하는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손을 맞잡고 해야만 합니다. 예, 바로 옆의 사람의 전화번호를 따세요. 우리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전화번호부가, 메신저 주소가, 바로 우리의 네트워크 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촛불을 처음 켜게된 것도, 공정택 후보가 교육감으로 당선된 것도, 바로 그 1:1 커뮤니케이션의 힘이었습니다. 아고라나 블로거의 힘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학생들 사이에 폭포처럼 퍼져나갔던 문자 메세지가 5월 2일의 기적을 만들었고, 강남 학부모들 사이에 선거 당일날 몇통씩 돌았던 전화가 공정택 후보를 어이없이 당선시켰습니다.

무작위의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그리 힘이 없습니다. 진짜 무서운 것은 내가 들고 있는 휴대폰의 전화번호부에 담겨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딸 시간입니다.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 같이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토론을 하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만들 시간이.

아마 인터넷 커뮤니티는 그것이 가능할, 더 많은 기획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촛불을 넘어서, 일상의 함께함을 가능하게 만들 기획이. 정기 모임은 어떻게 할 것인지, 번개는 어떻게 할 것인지, 신입 회원은 어떻게 받을 것인지 등등의- 뭐, 많은 분들에겐 이제 익숙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장담컨데, 그것이 가능하다면, 26개월 후의 선거 판세는 어마어마하게 달라져있을 겁니다. (…물론, 선거에 이긴다고 세상이 금새 변한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애시당초 뭐가 한번에 바뀐다는 것을 믿지 않는 탓이니다. 다만, 더 나빠지지 않게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강남 아고라에서 기획한 이명박 반대 프리허그

이유와 대답을 준비하자

그리고 이제, 하나하나 차근차근 질문하며 대답을 준비해야 합니다. 사실 이번 촛불이 켜져있는 동안,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경찰에 잡혀갈때 내 권리는 무엇인지, 집회의 자유란/ 주권재민이란 과연 무엇인지, 경찰이 함부로 공권력을 투입해서 시민을 폭행하는 것이 정당한 일인지, 인터넷 검열을 하는 것이 정당한 일인지… 우리는 아닌 것 같다-라고 생각하지만, 저들은 뭐를 해도 ‘내가 하면 옳은 일’이란 주장만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해야만 할까요? 자세히 고민하고, 연구를 해야합니다. 이건 어쩌면 블로거와 아고라의 몫이 되겠네요. 인터넷 검열을 하면 왜 안되는지, 시민들을 때리거나 함부로 연행하면 왜 안되는지, 공영방송은 왜 중립성을 지켜야 하는지… ‘주장’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이유를 댈 줄 알고, 그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 가야만 합니다. 굳이 경찰에 관계된 문제뿐만 아니라, 왜 비폭력이어야 하는지, 인터넷에 글을 쓸때는 어떤 예의를 갖추는 것이 나은지..등등의 문제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정말, 너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건 제 자신의 바보스러움에 대한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항의하고, 우리들 자신의 권리를 ‘구체적으로 지킬’ 방법들을 만들어가야만 합니다. 막연한 반대나 주장은 소용없습니다. 현실에서 실행가능한 정책, 만들어져야할 절차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거기에 덧붙여, (과감하게 민주당까지 포함해서) 진보정당, 민주노동당, 민주당등의 정당들은 앞으로 죽어라 더 바빠져야 합니다. 대안 정책을 만드는 것을 비롯, 수없이 많이 토론하고, 강의를 다니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야합니다. 자신의 표밭이나 선거 조직으로 네티즌들을 여기지 말고,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정책을 만들고 법안을 구상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시민들이 진보정당의 배후 세력이 되고, 진보정당은 시민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촛불은 이제 시스템이고, 네트워크다.

간략하게, 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 봤습니다. 이 가운데 저같은 블로거가 맡을 일은, 분명히 ‘이유와 대답을 준비’하는 쪽에 있겠지요. 부디 이 글이 ‘촛불 끄고 집에 가서 자자’는 이야기로 들리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부터가 그럴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할, 그리고 앞으로 미래를 준비할 계획을 가지지 않으면, 지금의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더불어, 저는 더이상, 이유없이 거리로 뛰쳐나가는 분들에게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싸움을 하려고 촛불을 든 것이 아닙니다. 저들의 일방통행을 막아내기 위해 촛불을 들고, 잘못된 폭력을 고발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기왕이면 더 나빠지진 않는 세상을 바라기에 거리로 나갑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도 없이 무조건 ‘닥치고 가두투쟁’만을 이야기한다면… 이렇게 말씀드릴께요. 놀러나오셨나고-

저는 이것을 전쟁이나 투쟁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찾는, 내가 나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여행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어쩌면 이명박 정권 5년 안에 끝나지 못할 일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죽을때까지 찾을 수 없는 길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우리가 걷는 길이 모이고 모이면, 그 길에서 함께 만나는 사람들과 즐거울 수 있다면, 분명, 우리들이 걸었던 뒷편에는 길이 생겨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즐겁게, 함께 손을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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