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폰 소녀에 대한 로망

헤드폰 소녀-를 처음 만난 것은 영화 ‘라붐’을 통해서였습니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이 소피 마르소에게 헤드폰을 씌워주는 장면에서, 처음으로 헤드폰이 하나의 소품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그리고 가끔은, 헤드폰을 씌워준다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 된다는 것도.

어찌나 영화의 음악을 좋아했는지, 잠시 홍콩 들렸을 때, 영화 라붐 1, 2 OST 합쳐진 짝퉁 -_- 카셋트 테잎을 사오기도 했었어요. 워크맨을 사달라고 조른 때도 이때고, 처음으로 워크맨을 들으며 거리를 다니던 것도 이때입니다. 맨날 라디오 녹음해서 짝퉁 테잎도 여럿 만들었죠,

…사실 이때만 해도, 여자친구랑 워크맨 나눠 듣는 것(한쪽씩 이어폰 꼽고)이 로망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기왕이면 리얼리티를…(응?) 물론, 아무리 그래도 헤드폰을 끼고 다닐 생각은 못했습니다. 그냥 워크맨 번들 이어폰이 고작이었지요..

잠자고 있던 헤드폰 소녀-의 대한 로망이 다시 눈뜨게 된 것은, 몇년전 SPEED의 뮤비 ‘Carry On My Way’를 보면서부터 였습니다. 이 뮤비에서 4명의 멤버는 각자 자기에게 어울리는 헤드폰을 끼고 밤거리를 헤매다니는데, 그 모습이, 왜 그렇게 매력적-_-이었는지… 뭐랄까, 도시에서 굴하지 않고, 자신을 길을 걸어가는 소녀들의 아이템이랄까요-

그러니까, 그건 단순한 음악을 듣기 위한 도구나, 패션 아이템 이상의 그 무멋-이었어요.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무기, 거친 삶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패, 그리고 외로운 밤길을 걷기 위해, 의지하는 유일한 친구…

이어폰이랑은 다르게, 헤드폰은 뭔가 세상에 속해있으면서도 함께 있지 않겠다- 나는 내가 만든 세상에서 살아가겠다-라는 보이지 않는 의지가 느껴지거든요. 세상과의 단절, 하지만 그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상.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만들 수 있는, 작은 나의 세상.

…결국 이 뮤비를 보다가, 처음으로 헤드폰을 질러보게 됩니다. 젠하이저의 PX200, 그것도 중고로. 그렇지만 1년정도 쓰고나니 단선이 되고, 헤드폰 종류는 AS 안된다는 말을 듣고 그냥 버리게 되지요…ㅜ_ㅜ 그리고는 다시 이어폰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 제게, 다시 헤드폰 소녀(?)의 로망을 불태우게 만든 영화가 바로, ‘릴리 슈슈의 모든 것’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헤드폰을 끼고 나오지요. 맞아요. 우리의 학창 생활은 생각보다 잔인합니다. 어른이 아니기에 가지고 있지 않은 적당한 예의의 결여. 형식적인 것들의 결여. 그리고 그것에서 나오는, 때론 놀라울 정도의 무서움과 흉폭함.

오직 위로가 되는 것은 음악과 네트워크의 관계뿐. 현실이란 이름의 지옥에서, 겨우 숨을 쉴 수 있게 만들어주는 노래- 릴리 슈슈의 음악. 헤드폰을 끼고 자신의 세계를 만들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는 삶의 고통들. 아직 겪어보지 않았기에 더욱 괴로운, 그런 나날들.

단절, 그리고 세계. 거기에서 비롯되는 무관심. 어쩌면 헤드폰 소녀에 대한 로망을 자극하는 것은, 이 세가지 단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도도함-이 가진 매력이랄까요. 나쁘게 말하자면 자신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있는 것이지만 … 이런 세상에서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선, 그런 도도함은 언제나 필요하니까요.

세계, 단 하나의 손짓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세계, 나의 세계. 그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입구가 바로, 헤드폰인 셈입니다. 우리가 알게모르게 부리는 아주 간단한 마법. 그리고 그 마법을 이해하는 사람은, 헤드폰 소녀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답니다. 작은 세계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는 그녀를.

* 그러니까- 이 영화를 보고나선 죽어라 -_- 빽폰을 찾아서 헤맸다는 이야기. (응?) 그렇지만 결과는 참혹. 빽폰은 음악듣기 위해 함부로 쓸만한 물건이 아니더군요… 일단 제품 자체가 거의 없고, 스포츠 용으로나 좀 나와있으며, 그로인해 다양한 현대 생활에는 걸리는 부분이 너무 많았습니다. (…지하철 개표기에 백폰 쓰고가다 걸려보신 분?)

그렇게해서 저승으로 보낸 백폰이 셋. 결국 크레신의 헤드폰으로 다시 낙찰을 보고.. 그 이후론 귀에 걸리는 형식의 이어폰과 크레신, 오디오 테크니카의 헤드폰, 블루투스 헤드셋등을 바꿔가면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얼마전 여행에서, 새로 마음에 대는 헤드폰을 하나 장만했습니다. 바로 BOSE의 트라이포드 입니다. 팩토리 리패키징 제품을 90달러대에 팔고 있더군요.

* …헤드폰 소녀 화보집이 출시되어 있었더군요. 전혀 몰랐습니다. -_-;

* 헤드폰 소녀 모에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는 NIKINS님 이글루(링크)를 참고해 주세요. 역시 이글루는 넓고 광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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