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번호부를 정리한다는 것은

앞으로 어떻게 휴대폰 시장이 변화할지 몰라, 구글 주소록…으로 모든 것을 통합 관리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다행히 파란닷컴 주소록에는 다양한 주소록 파일 형식뿐만 아니라, 휴대폰에 있는 전화번호부도 저장할 수 있어서, 예전에 문자 전송 사이트에 등록되어 있었던 주소록과, 아웃룩 파일로 가지고 있었던 주소록과, 구글 주소록에 담아놨던 주소록과, 휴대폰에 있는 주소록을 합치고 나니…

…어느 사이, 등록된 이름이 2000명이 넘어 버렸습니다. 아시겠지만, 2000명이 넘어가면 주소록 관리가 매우 힘들어집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주소록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참… 이거, 대체 무슨 미련이 그리 많았었는지… 씁쓸한 미소를 짓게 만들어주네요.

▲ 파란 주소록(http://addr.paran.com/)은 휴대폰 주소등록
기능을 지원합니다.

물론 가장 많은 것은, 역시, 중복된 이름…-_-;; 입니다. 여러군데 분산된 주소록을 하나로 합쳤기 때문인데요, 대충 살펴보니, 6~700명은 중복된 이름이군요…-_-;; 일단 이 이름들 먼저 정리합니다. 그 다음으로 정리되는 명단은, 딱 봤을때 누군지 떠오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예전에..-_-; 잡지랑 웹진일 하면서, 본의 아니게 많은 분들에게 연락을 드리고 했었는데요…슬프지만, 그 중 상당수가 지금은 전혀- 기억 나지 않는 분들이더군요…ㅜㅜ 그래서 그 분들의 이름을 지웁니다.

그 다음은 일 때문에 한두번 연락하고 다시 연락한 적 없는 사람들… 이 분들에겐 제가 연락할 일이 앞으로 없을 것 같아서, 지웁니다. 이렇게 일이랑 연관된 전화번호를 지우고 나니, 남는 것은 친구들 전화번호 밖에 없습니다. … 그런데 참, 저도 나쁜 놈인 것이, 말로는 친구라면서, 지난 1년간 한번도 연락하지 않은 사람이 절반이 넘더군요…;;

▲ 맞아요. 숫자가 많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더라구요.

결국 보고서, 앞으로도 잘 연락하지 않을 것 같은 친구들은 지웠습니다. 만나고,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옛 직장 동료들 중에서, 지금 연락하지 않는 친구들 번호도 지웁니다. 옛 커뮤니티 친구들 중에서, 지금 연락하지 않는 친구들 번호도 지웁니다. 정말, 지우고 또 지웁니다.

예전 여자친구 번호도(대체 왜 가지고 있었을까요), 한번 소개팅하고 다시 한번 안본 사람들 번호도(…이건 더더욱 이해가 안됨)… 잠깐의 모임을 위해서 나눠받았던 번호도… 모두, 지웁니다. 그러니까, 지난 1년동안 한번도 안봤던 사람들은요. 이러니까, 가지고 있는 번호가 쭈욱 줄어듭니다. 어느새 천번 이하로 떨어졌네요.

맞아요. 생각해보니, 저는 전화번호부를 정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를 정리하고 있는 것 같네요. 별 것 아닌 2000명의 전화번호 속에, 제가 지난 십년간 살았던 것이 삶, 맺어왔던 관계들이 거의 다 들어있었습니다. 내가 활동했던 동호회, 내가 만났던 사람들, 내가 함께 울고 웃었던 사람들, 스쳐지나다 인연이 되었던 사람들… 그리고 어느새 만날 수 없게 된 그리운 이름들.

돌아가신 아버지 번호가 아직도 남아있었습니다. 꾹꾹 눌러 지웁니다. 자살한 친구의 번호도 있네요. 꾹꾹 눌러 지웁니다. 이 녀석은 갑자기 폐렴이 생겼는데도 일하다가, 입원한지 사흘만에 죽었었죠. 꾹꾹 눌러 지웁니다. 이 아이는 참 좋아했었는데, 유학 나간 이후로 한번도 연락을 주고 받은 적이 없네요. 꾹꾹 눌러 지웁니다. 이 아이랑은 참 아프게 헤어졌는데, 이 아이는 말을 참 조근조근 잘해서 빛이 났었는데, 이 아이는 밤길을 걸으며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었는데… 모두, 꾹꾹 눌러 지웁니다.

나는 결국 그렇게 지난 시간을 정리하며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신들 때문에 즐거웠던 것, 행복했던 것, 외로웠던 것… 모두 기억하고 간직하며 살아갈겁니다. 하지만, 이제 이렇게 번호로 남겨두기엔, 조금 모질게 변해버린 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정리하며 앞으로 나갈 수 밖에는 없습니다.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 버려진 관계들까지 모두 껴안으며 살아갈 여유가, 지금의 제게는, 없습니다.

…연락하게 될 사람들, 연락하고 싶은 사람들, 연락해주는 사람들… 그 사람들만 껴안고 살아가기에도, 제 삶은, 조금 버겁기 때문입니다. 예, 미안합니다. 당신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들에게, 참 많이 고맙고도 미안합니다….

일요일, 많이 쌀쌀한 저녁, 나는 그렇게 당신들과 안녕, 인사를 나눕니다. 들리지 않는 곳,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있는 당신들에게. 정말, 고맙고도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 그나저나, 몇몇 번호들은 가지고 있기도 뭐하고 지우기도 뭐해서 참 많이 망설이게 만들어주는 군요. 예를 들어 변희재라거나, 낸시 랭이라거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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