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때 “1만시간의 법칙”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라는 책에서 인용해 유명해지기 시작한 이 말은, 원뜻과는 다르게 “성공하려면 투자한 시간이 적어도 1만 시간이라는 공을 들여야 가능하다”라는 식으로 오해됐던 말이기도 하다. 실은 어떤 일에서 “마스터”급의 단계에 오르려면 1만시간 정도의 수련이 필요하다는 말로, 1만시간을 들이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성공에는 세가지 조건이 맞아 떨어져야 한다. 타고난 재능, 성실한 훈련, 그리고 운. 타고난 재능은 적성을 말하는 것이니 다양한 일을 해보면서 잘 찾으면 되고, 성실한 훈련은 두말할 것도 없는 필수 조건이다. 그런데 기회-는 정말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 결국 우리의 성공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어떤 운-을 잘 타고나야 하는 것일까? 반쯤은 맞지만, 반쯤은 틀리기도 하다.
…흔히 하는 말이지만, “운은 준비된 자만이 붙잡을 수 있다.”
2. 애플을 떠난 1985년부터 토이스토리가 개봉한 1995년까지, 스티브 잡스는 인고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새롭게 시작한 넥스트 컴퓨터는 수익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고, 하드웨어 회사로 생각하고 인수한…;; 픽사는 하드웨어 사업에서는 죽을 쑤고 있었다. 캐논과 로스 페로등의 투자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잡스의 피를 말리는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몇년동안 이어졌던 IBM과의 협상은 거의 될 것처럼 보였지만, 협상을 담당했던 IBM의 빌 로-가 제록스로 자리를 옮기면서 실질적으로 무산되었다. IBM은 선행 투자금만 지불하고 그 이상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않았다. 모토로라는 1987년에 개발해서 주기로한 신형 CPU를 1989년까지 질질 끌더니, 결국 넥스트 컴퓨터에 부족한 CPU를 제공하고야 말았다.
그사이 스티브 잡스는, 오리지널 매킨토시에 그랬던 것처럼 넥스트 컴퓨터에도 몇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플로피디스크 대신에 광자기 드라이브를 장착했는데, 비싸고 범용화도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고장이 잦았다. 윈도즈와 OS/2 의 전쟁이 막 벌어지기 시작한 참에 참전한 넥스트스탭이란 OS는 별로 주목을 끌지 못했다. 한마디로, 겉만 번드르했지 비싸면서도 성능은 모자랐다.
…결국 디즈니사를 찾아가 펼친 대본없는 프리젠테이션에선, 제프리 카젠버그(당시 이사, ‘인어공주’ 같은 애니메이션으로 디즈니를 부활시킨 장본인)에게 이렇게 한방 먹는 일까지 벌어졌다.
잡스 : 이 넥스트 컴퓨터만 있으면 이제 누구나 애니메이션을 직접 만들 수 있습니다!
카젠버그 : 애니메이션은 내 것이요. 누구도 애니메이션을 가져갈 수는 없어! 그건 누군가가 내 딸과 데이트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구. 누가 내게서 애니메이션을 가져간다면, 그 놈의 불알을 엽총으로 쏴버릴거요.
이때 잡스가 넥스트 컴퓨터에 투자한 비용이 2000만달러였던가..그렇다. 뭐, 로스 페로도 2천만, 일본 캐논은 1억 달러를 투자했으니 그에 비하면…
▲ 1995년의 스티브 잡스.
…스트레스는 비만과 탈모를 불러옵니다.
3. 그렇지만 1986년에 천만달러에 잡스에 인수된 픽사에 비하면 넥스트 컴퓨터는 나은 편이었다. 픽사 컴퓨터 시스템은 기막힌 성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너무 쓰기 어려웠으며 너무 비쌌다. 몇몇 대학과 정보당국에서는 이 제품을 구입했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1988년, 픽사는 한달에 100만달러를 쓰면서도 1년간 컴퓨터를 100대보다 조금 더 팔았을 뿐이다.
게다가 그 와중에 잡스는 존 래스터(현재 픽사의 COO)의 애니메이션 팀을 해고하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이 회사가 감당할 수 없는 사치에 불과하다는 이유를 들어. 만약 픽사의 창립자 에드와 앨비가 잡스에게서 래스터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1988년 「틴 토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오스카상을 수상하지 못했다면, 「토이 스토리」는 영영 만들어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넥스트 컴퓨터는 직원의 3/5 정도를 해고해야만 했다. 픽사도 예산 삭감을 위해 절반 가까운 직원들을 해고해야 겠다. 아이러니한 것은, 고통스런 예산 삭감 회의 다음에 다시 수십만달러의 예산을 지출해야 하는 애니메이션 제작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물론 돈은 스티브 잡스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영화가, 앞서 말한 오스카상을 수상한 영화, 「틴-토이」다.
4. 당시 스티브 잡스는 형편없이 주저앉아있었다. 80년대중반,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잡스의 재산은 80년대 후반에는 수중에 2500만달러밖에 남지 않았었다. 1989년, 스티브 잡스는 두 사업에서 모두 손을 떼야 정상이었다. 넥스트 컴퓨터와 픽사의 실적은 재앙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냥 해보겠다고 갔다.
덕분에 수많은 직원들이 해고되어야 했지만, 어쨌든 회사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결혼도 하고 -_-; 카네기 멜런 대학에서 마하 커널의 핵심 개발자들을 데리고 왔다. 그 다음에도 상황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디즈니와 계약이 성사된 픽사는 좀 나았지만, 디즈니는 ‘토이 스토리’ 제작 결정을 1993년에야 겨우 내렸다. 넥스트 컴퓨터는 나중에 매출 실적이 4배가 높아져서… 1992년, 1년에 2만대를 팔 수 있었다. 1995년, 창업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직원들이 회사를 떠났다.
잡스는 수중에 돈이 거의 다 떨어져가고 있었다. 넥스트 컴퓨터의 문제로 언론의 심한 공격… 아니, 거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상태였다(잡스가 언론을 기피하는 이유가 이때의 경험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픽사는 ‘렌더맨’ 소프트웨어가 잘 팔렸기에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여전히 상황은 좋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93년말, 디즈니는 ‘토이 스토리’ 제작 중지 결정을 내렸다.
결국 픽사팀은 디즈니와 갈등을 빚었던 이야기를 수습해서, 다시 카젠버그를 찾아간다. 그런 변경이 마음에 들었던 카젠버그는 제작 중단을 취소했다. 그리고 1995년 토이 스토리가 개봉했다. 픽사가 주식을 공개했다. 스티브 잡스는 그날 저녁 다시 억만장자가 되어 있었다.
5. 그 다음부터 이야기는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망해가던 애플의 신규 OS를 책임지게 되고, 임시 CEO가 되고, CEO가 되고, 아이맥과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맥북에어를 내놨다.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잡스는 이때 이후의 잡스다. 그 이전, 잊혀진 10년-에 대해선 다들 별로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때가 없었다면, 지금의 스티브 잡스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10년간, 잡스는 수도 없이 많은 것을 배웠다. 하드웨어 만큼이나 소프트웨어가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고, 어떤 기기보다 그것을 통해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콘텐츠 시장의 가능성을 맛보았고 자신이 만들 컴퓨터의 미래를 꿈꿔볼 수 있었다.
넥스트 컴퓨터에서 만들어진 OS는 OSX가 되었고, 그 OSX는 담글질되며 다시 iOS가 되었다. 아이튠즈 스토어를 만들어 음악시장을 뒤바뀌어 놓았다.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네모난 상자는, 이제 아이폰/아이팟/맥미니가 되어 우리곁에서 숨쉬고 있다.
언론의 폭언과 조롱 속에서, 사업의 실패 속에서, 가진 것 하나 없는 나락에 떨어질 위기에 처해있어도 잡스는,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그 빌어먹을만큼 무모한 신경은 상식과 논리로 포장된 말들을 외면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데로 가버렸다.
….그런 잡스가, 이제 잠시, 멈추려고 한다. 애플의 CEO를 사퇴하고 회장으로만 남겠다고 한다.
아마 당분간,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를 보기 어려워질 것이다. 어쩌면 이승에서 볼 수 있는 날이 몇년 남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괜찮다. 그는 불도저처럼 달려온 삶을 살았다. 그 이야기를 살펴보다보면,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날 정도로 질주하는 삶을. 그러니 부디 오랫만에 맞는 평화를 즐기기를. 부디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