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 보복에 대한 입장 정리

 

일본, 상호 의존성을 무기로 삼다

 

언젠가 올 줄은 알았다. 지금일 줄은 몰랐다. 지난 7월 1일 일본 경제산업성에서 발표한,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리지스트, 에칭 가스 수출 규제(+ 화이트 리스트 해제)에 대한 이야기다. 일본 뉴스 포스트 세븐이 지난 4월 업데이트한 기사(링크)에 따르면, 이 보복 방안은 지난 1월부터 검토되었다. 3월에는 송금 정지, 비자 발급 정지 등에 대한 논의도 오갔다.

 

다만 이 방법은 효과적이지만 피해가 일본 기업에게도 돌아오고, 명분이 없기 때문에 정말 실행되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다들 말하고 있지 않지만, 생각해 보자.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가 승소하고, 배상하지 않는 전범 기업 압류 자산에 대한 현금화에 나섰다고 해서, 한국 반도체 기업에 대한 징벌적 수출 규제가 타당할까? 정말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나? 이 문제가 무역전쟁을 불사할 정도로 큰 사안이었나?

 

그냥 ‘어떻게든 한국을 혼내야겠다’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쓰기 힘든 칼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고 배운 탓이겠지만, 상호의존성-을 무기로 삼다니, 제정신인 걸까. 물론 일본은 그냥 ‘한국은 믿을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줬던 특혜를 뺏는 것(정치가 아니라 안보문제다)’이라고 말하지만, 국제 사회에서 한국을 그런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일본 정부와 우익뿐이다. 어차피 WTO에 걸리지 않으려고 찾은 명분이다.

 

납득하기 어렵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아직 규제가 실행된 상황도 아니지만 한국 사회는 큰 충격을 받은 듯 보인다. 일본 우익은 신났다. 그동안 일본이 봐주고 있어서 한국 경제가 성장했던 걸 모르는 거냐고, 버르장머리를 좀 고쳐야 한다고 나선다(일본 문예춘추 4월호에선 이미 한국과 국교 단절까지 논했다). 제조업의 공급망을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니 놀랍다.

 

진짜 리스크를 알려주다

 

세계 각국이 상호의존성을 무기로 삼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모두 죽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일본이 원재료→ 한국이 중간재→ 중국이 완제품을 만드는 식의 체계가 굳어진 지는 꽤 됐다. 국제적 컨베이어 벨트나 마찬가지라 하나가 타격을 받으면 다른 과정도 타격을 받는다. 괜히 “맥도널드 지점이 있는 국가들끼리는 서로 전쟁을 하지 않는다”라고 토머스 프리드먼이 말한 게 아니다.

 

한국 기업에게 그동안 왜 그런 재료 국산화 안했냐고 물을 필요도 없다. 잘하고 가격 맞는 회사가 있는데 굳이 개발하는 게 이상하다. 선택과 집중이 없었다면 우리 경제가 성장하지도 못했다. 다만 지금까진 상호의존성이 큰 리스크가 될 거라 여기지 않았다. 특정 기업 의존은 공급망 관리라는 점에선 분명 문제가 있었지만, 약점이 되리라 생각 못했다.

 

당장 에칭 가스 한 품목만 해도, 일본이 한국에 수출하는 금액이 2018년 기준 약 75억 엔에 달한다. 수출 총액 약 84억 엔 중에 9할을 차지한다. 한국은 대만에 이어 반도체 기술시장 2위 국가다. 이런 밀접한 관계(?)가 정치에 의해 깨질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다. 당장 관련 일본 회사들도, 어떻게든 해당 재료를 한국 관계사에 공급하려고 움직이고 있다. 공급망 측면에서 한국 기업과 일본 기업 은 한통속이나 마찬가지다.

 

어쨌든, 고맙게도(?) 그게 얼마나 큰 리스크인지 이번에 분명해졌다. 사실 이번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 삼성이나 LG, SK하이닉스에서 몰랐다고 보지 않는다. 시기가 조금 빨라졌을 뿐, 대응 시나리오는 준비했다 생각한다. 물론 일본 정부가 진심으로 나오지는(완전히 수출 금지를 시키지는) 않을 거라는 가정 아래서 대응이다. 아무튼 앞으로 공급망 관리는 예전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아베는 왜 지금 이런 일을?

 

다른 문제도 있다. 아베 정권은 정치 사안을 이용해 경제를 건드렸다. 지금까지 한일 양국 관계는 정치는 정치대로, 경제와 문화는 그대로-라는 묵시적 규칙 위에 있었다. 겉으로는 한일 양국 관계가 극단으로 치달아도 민간에선 교류할 만한 것은 다 그대로 했다. 그러니 한가하게 ‘한국 국민감정은 건드리지 않으면서’, ‘일본 보복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불만이 정권으로 가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일본 평론가들이 있는 거다.

 

정치 문제가 경제 문제로 커졌기 때문에, 이번 일을 벌인 이유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다. 누군가는 미중 무역분쟁으로 인해 생길 떡고물을 놓고 경쟁하기 위해 벌였다고도 한다. 일본 우익은 아예 일본이 국제 공급망 재편을 노리고, 미국의 승인을 얻어, 삼성을 노리고 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망상이다). 누적된 한일 관계에 대한 불만이나, 무응답으로 일관하는 한국 정부의 태도를 문제 삼기도 한다.

 

하지만 굳이 일본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점에서, 아베 정권의 의도는 명백하다.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는 아베 정권이, 한국을 때려 보수층을 결집, 선거에서 승리하겠다는 것. 다시 말해, ‘전쟁 가능 국가’가 되기 위한 일본 평화헌법 개정에 필요한 의석을 모으기 위해, 한국과의 불편한 관계를 이용하겠다는 것.

 

그 이유가 아니라면 처음부터 이렇게 강한 수단을 내세워 압박하는, 애매한 시기(전범 기업 압류 자산에 대한 현금화가 집행될 경우 보복할 거라 생각했다)의 경제 보복을 할 리가 없다. 아니 당장 크게 벌어진 일이 없는데, 다시 말해 보복당할 일(…)이 없는데 지금 보복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햐아. 애당초 압류 자산 현금화를 한다고 해서 경제 보복에 나설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 이게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사람들이, 뭔가 이상하다고.

 

평화헌법 개정의 들러리가 될 순 없다

 

현재 상황을 풀기 위한 대처 방안은 생각보다 꽤 명백하다. 이번 사안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알 수 없지만, 짧게는 정치적으로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 판결의 해법을 찾고, 안정적으로 주요 소재가 계속 공급될 수 있게 하는 일. 길게는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주요 소재를 국산화하며, 미중 무역 갈등으로 인한 세계적인 공급망 변화 움직임에 함께 대응하는 일.

 

정치력이 필요한 부분이라 난제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견지하고 있는 원칙은 버려서는 안 된다. 애당초 법원이 판결한 일에 행정부가 나설 수 있는 범위가 넓지 않다. 해당 사안은 민간 기업에 대한 사안이다. 다만 주의할 점은, 우리가 일본 평화 헌법 개정을 위한 들러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민당의 개헌 의석 확보를 위한 먹잇감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결국, 차갑고 신중한 대응이 요구된다.

 

보수언론에서 제 때를 만난 듯 때려도, 정부는 좀 더 침착하게 가야 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이미 대응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겠지만, 그냥 그대로 실행하면 된다. 폴더블 스마트폰? 그거 좀 한참 늦게 봐도 된다. 나중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생각할 수 있게 해 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우리도 마찬가지다. 지난 박근혜 퇴진 운동 때를 기억하자. 일본 우익에게, 어떤 빌미도 줄 필요가 없다.

 

소탐대실이다. 일본은 멀리 봐서 아주 안 좋은 선례를 남겼다. 그것도 재료 부문에 있어서 확고한 우위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기에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써서는 안 되는 칼을 썼다. 일본 기업 입장에서도 어안이 벙벙했을 듯하다. 나라가 고객에게 칼을 들이민 꼴이니까. 안 그래도 경제가 어려운데 시비 거는 사람을 만났다. 잘됐다. 이 기회를 우리가 가진 리스크를 고칠 기회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차피 지금, 많은 게 바뀌고 있는 과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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