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 그리고 미생

설국열차, 그리고 미생

1. 이정환 기자가 미디어 오늘에 글을 썼다. 「미생, 장그래가 말하지 않는 것들」이다. 강수돌 교수와의 인터뷰를 녹여쓴 이 만화 비평은, 웹툰 미생이 인기를 얻는 이유는 미생 자체에 '노동중독 사회'의 본질을 날카롭게 파고들고 있기 때문이며,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에 동질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라 안타깝다고 말한다. 일해서 성과를 내봤자 사장님들만 좋아 죽는 세상에서, 그런 문제의 본질을 지적하진 못하고 있다고. 현실만 잘 드러내고 끝이라고.

...그 글을 읽다가 설국열차의 '남궁민수(송강호 분)'가 생각났다.

2. 설국열차의 남궁민수가 그랬다. 열차만 보지말고, 열차 밖을 보라고. 열차밖으로 나가도 살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하지만 커티스(크리스 에빈스 분)는 끝내 열차의 맨 앞쪽칸, 엔진실로 들어가는 길을 택한다. 그는 열차밖에서 살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열차의 엔진칸을 장악하면 꼬리칸의 사람들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믿는다. 그것을 위해 일으킨 폭동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가 받아들인 세상의 규칙이다.

...그 끝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그 폭동조차 시스템의 일부였다는 것. 그 사실을 알려주며 윌포드는 모든 고난을 이겨낸(테스트를 통과한?) 커티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싶어했다. 예전의 폭동 주동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커티스는 순응하길 거부하고 남궁민수와 함께 열차를 폭파시켰다는 것.

 

3. 커티스가 처음부터 열차를 폭파했다면 과연 이야기는 어떻게 됐을까? 그들은 행복(?)했을까? 대답하기 어렵다. 그게 과연 가능했을까?란 질문이 먼저 나온다. 이정환 기자는 강수돌 교수의 입을 빌어 이리 쉽게 말한다. "개인적 집단적 실천이 없는 상태에서 자본주의 세계 체재를 전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옳고 그름을 떠나 그 말이 그리 헛헛하게 여겨졌던 것은, 그래서 뭘 어쩌라고?라는 질문이 반드시 나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체재내의 사람들은 그 체재에 기반하여 살아간다. 체재는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환경이다. 개인이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 체재에 기반해 자라온 사람들은 당연히 그 체재의 규칙을 내면화할 수 밖에 없다. 그 체재의 나쁜 점을 가장 잘 아는 것도 그 사람들이다. 장점은? 글쎄... 뭐 어쨌든 예전보다는 좋아진 세상에서 살고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4. 다른 체재를 만나야 비교가 시작된다. 다른 것을 알아야 비교를 할 수 있다. 수도 없이 많은 북유럽을 비롯한 다른 사회의 사례들을 말하고, 대안을 찾는 것은 그런 이유다. 옳고 그름으로 판정을 내릴 순 있을지 몰라도 세상이 바뀌진 않는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왜 그 체재의 잘못된 점을 내재화하고 있냐고, 받아들이냐고 말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대뜸 남궁민수가 커티스에게 열차밖을 보라고 한들, 그걸 커티스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기사를 읽다가 살짝 짜증났던 것도 그런 이유다. 글에서 이정환 기자는 '장그래의 생존 투쟁을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강수돌 교수를 빌어 우아하게 평가절하하고 있다. 너는 자본의 원리를 강하게 내면화하고 있다. 거기서 끝이다. 그래서 이 웹툰은 공허하다-이러면서. 체재 안에서 안락과 상승을 꿈꾸는 것을 간단하게 무시한다. 하지만 과연 그게 그렇게 무시되어도 좋은 욕망일까? 세상은 선/악이 아니라 사람의 욕망에 기반해 움직이다(-고 나는 생각한다.).

5. 최소한 남궁민수는 크로놀이란 수단이 있었다. 환각제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많이 모아 불을 붙이면 폭탄이 되기도 하는 크로놀이. 그리고 그 크로놀을 열심히 가져다 모았다. 커티스가 설득당하든 아니든, 그는 어차피 열차를 깰 생각이었으니까. 그래서 남궁민수는 커티스가 말하는대로 이용되어 준 것이니까.

지식인 그룹이란 것이 만일 있다면, 커티스를 타박하기 전에 크로놀을 먼저 찾아라. 열차밖의 눈이 녹고 있다는 증거를 찾았고, 그래서 나가서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면, 크로놀을 찾아라. 그래야 커티스를 찾을 수 있고, 때가 되면 열차를 깰 수도 있을테니까. 그게 없다면 아마, 설국 열차의 엔딩은, 그냥 커티스랑 윌포드랑 남궁민수랑 같이 죽고 열차는 앞날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끝났을테니까. 아니면 같이 찾아보자고 먼저 말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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