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소원 취하하면, 내 남자가 아니다_지영준 법무관

헌법소원 취하하면, 내 남자가 아니다_지영준 법무관
군 불온서적 관련해, 헌법소원을 냈다가 파면당한 두 명의 법무관을 기억하시나요? 경향 신문에서 그 법무관 가운데 한 명인, 지영준 전 법무관을 인터뷰 했습니다. 기사를 읽다보면, 군 법무관들이 왜 헌법 소원을 내게 됐는지, 그리고 그후 어떤 일을 당했는 지가 잘 나와 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당연한 상식을 따져물었다가 파면까지 이르게 됐더군요. 그런데 읽다가, 몇 군데 가슴 찡-하게 만드는 구절이 있어서 옮겨 적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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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한테 가장 미안하죠. 저와 친한 사람들은 중징계가 나올 것을 직감으로 느꼈다고 해요. 계속 ‘헌법소원을 취하하라’고 했었죠. 파면당하고 2~3주 후에 국방부에서 항고심할 때도 ‘지금이라도 취하하라’고 했고요. 그런 얘기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난 게 가족이었어요. 고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만약 당신이 취하한다면 내가 믿어왔고 멋있다고 생각했던 그 남자가 아니다’라고 하더라고요. 돈을 벌어오는 사람이 없어 힘들긴 하지만 가족이 잘 버텨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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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는 국방부의 불온서적 지정을 보면서 자존심이 많이 상했습니다. 제가 지난해 헌법 공부를 하면서 고민했던 게, ‘국군 조직이 과연 행정기관인가’ 하는 문제였어요. 국방부는 군을 하부 조직인 것처럼 여기고 있는데 국방부와 육·해·공군은 상하 관계라고 보기 어려워요. 군 통수권은 대통령에게 있고 군은 국방부 장관이 있기 전에 존재하는 조직 아닙니까. 국방부 장관은 대통령의 통수권을 보좌하는 기관이고요. 국방부-군의 관계는 법무부-검찰의 관계와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국방부가 불온서적을 지정한다면 국방부 직원들이나 못 읽게 하면 되는 거예요. 더욱이 국방부는 장병들한테 그 책들을 읽지 말라고 했는데, 장병이면 장교와 병사입니다. 장성들도 읽지 말라는 얘기예요. 국방부가 군인들의 수준을 얕잡아 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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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통신사업법에 관한 것이긴 했지만 헌법재판소가 ‘불온’이라는 표현 자체에 대해 위헌 결정을 했고, 법무관들도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불온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에 뺐던 거죠. 이런 공감대가 2007년까지는 형성돼 있었어요. 그래서 저희 법무관들도 불온표현물 조항은 사문화됐다고 믿었는데 2008년 이 조항을 근거로 불온서적이 지정된 겁니다. 상황이 이러니 ‘사회가 20년 전으로 후퇴한 것 같다, 군이 하나회 해체 이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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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후배들이 군법무관이란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더 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헌법소원을 취하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파면되면서 오히려 후배들의 불안감이 커졌어요. 자신들도 파면될 수 있다는 걱정 탓에 순종적으로 변하는 거죠. 불온서적 외에도 후배들과 준비하고 있던 헌법소원이 있는데 이번 일로 후배들이 많이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강했던 후배들인데 겁을 먹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나더라고요. 후배들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이기는 습관'이란 책에서, 한비자를 인용한 부분이 나옵니다. 어느 나라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 나라의 임금이 책을 읽다 잠이 들었는데, 마침 임금의 옷을 챙기는 신하는 근처에 없고, 임금의 왕관을 챙기는 신하만 근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관을 챙기는 신하가 잠든 임금에게 옷을 덮어주게 됩니다.

그 다음 일어난 임금은 전후사정을 듣고, 어떻게 했을까요? 간단합니다. 옷을 챙기는 신하와 관을 챙기는 신하, 둘 다를 모두 벌 줬습니다. 이에 놀란 신하들이, 왜 관을 챙기는 신하까지 벌 주십니까-하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신하는 각자가 맡은 역할을 최선을 다해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관을 챙기는 신하가 옷을 챙겼다고 상을 주면, 그 다음부터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의 입만 쳐다보고 있게 된다-고.

...그런데 우리는 지금, 옷을 챙기는 신하가 옷을 챙겼더니, 임금의 비위를 상하게 할지도 모른다고 파면해 버리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참 많이, 답답하면서도 부럽습니다. 그런 일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암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멋진 가족들과 함께 사시고 있다는 것이 부럽습니다.

...저도 저런 사람 만나고 싶습니다. 제가 가는 길을 끝까지 믿고 인정해줄. 하지마-가 아니라, 괜찮아- 계속 가던 길을 가라고 말해줄 수 있는.

참, 부인이 좋으신 분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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