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을 시켜두고 생각나는 사람

1. 대학 신입생 시절, 같이 커피 마시러 자주 다니던 친구가 있었다. 한참 커피 전문점 붐이 일었던 때로 기억한다. 수업이 없을 때면 커피가게에 가서 죽치고 앉아 책 읽고, 이야기하고, 가끔 테이블에 엎어져 자는 것이 우리들 일상이었다. 어느 날 학교 앞에 있는, 2층에 위치한 커피숍에 갔다. 5월, 조금 더웠던 날로 기억한다.

그 카페는 특이하게 토스트를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었다. 배고팠던 우리는 당연히 거기에 끌렸고, 산더미..는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보다 약간 많은 토스트와 쨈과 버터를 가지고와 자리에 앉았다. 허겁지겁 먹으려는데, 그 애가 내 손에 든 빵을 뺏는다. 그리곤 빵에 버터를 바르고, 설탕을 뿌리고, 다른 빵을 얹더니 내게 내민다.

우리 집에선 이렇게 먹는데, 이게 더 맛있어.

순간 내 얼굴이 빨갛게 변한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다. 맞다. 그 순간, 나는, 그 애에게 반했다. 아르바이트 하는 학생이 우리에게 커피를 가져다 줬다. 나는 허겁지겁 빵과 커피를 마시다, 혀를 커피에 데였다. 그래도 빵은 맛있었고, 커피는 향기로웠다. 커피와 버터에 설탕을 뿌린 빵이 있던, 이른 오후 2층 커피샵.

지금도 가끔 2층에 있는 커피숍을 볼 때면, 그때가 기억나곤 한다. 커피와, 빵과, 그 아이가 있던 풍경이.

2. 이 책을 발견한 것은 한양문고에 「백귀야행」을 사러 들린 날이었다. 다른 건 볼만한 것 없나-하고 찾고 있는데, 왠지 굉장히 눈에 익은 일러스트가 그려진 책이 보였다. 커피와, 그 커피를 앞에 놓은 사람들이 보였다. 매판에 놓여있던 것은 3권이라, 카운터 옆 책장을 뒤져 1권을 찾아 사서들고 나왔다.

오는 지하철에서 읽는데, 커피가 마시고 싶어져 죽는 줄 알았다. 다음날 한양문고에 다시 들려, 「커피 한 잔 더」 2권도 마저 사가지고 왔다. 요즘은 이렇게, 감으로 지른 책들이 별로 실패하지 않는다.

3. 이 책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같은 이야기처럼 나가다, 씁쓸한 뒷 맛을 남기며 마무리한다. 사실 걸작이라고 이야기하긴 어렵다. 빼곡히 모여있는 단편들이, 서로 좌충우돌하는 것 같기도 하다. 커피-라는 것을 빼면, 서로 다른 스토리 작가가 쓴 글을 한 명의 만화가가 만화로 옮겨놓은 것만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유일한 주인공은 그냥 ‘커피’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이야기에서 한번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유일한 ‘것’이니까.

4. 모든 커피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비슷한 맛을 지닌 커피야 많이 있겠지만, 우리가 어느 곳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그때 그 순간만큼은, 한번 지나고나면 영영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커피들은 지금도, 누군가와 함께 어느 곳에서, 어떤 인생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냥 남에게 풀어놓으면 흔하디 흔한 세상살이일 뿐이지만, 자기 자신에게 만큼은 소중해지는 그런, 순간의 이야기들을. 헤어짐, 짝사랑, 실패, 지나간 연인, 착각, 우연, 죽음, 태어남… 이 책에 담긴 에피소드들은, 모두 그런 것들이다. 어릴 때는 목놓아 울고 하소연해보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면 들 수록, 그냥 인정할 수 밖에 없음을 알게되는 것들.

그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체념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들.

5. 지금도 커피를 마시며 이 글을 쓴다. 비가 온다. 지금 내 커피는, 나를, 비오는 밤에 혼자 중얼중얼 커피 이야기나 적어가는 사람으로 기억하겠지. 아니면 새벽까지 잠 못 이루고 청승이나 떠는 못난 남자로 기억할 지도 모른다. 어쨌든 저쨌든.

정말, 맛있는 커피 한 잔이 그리운 밤이다.

* 글쓰면서 다시 보니 이게 왠 일, 번역한 이가 오지은(링크)이다…;;

커피 한 잔 더 1 –
야마카와 나오토 지음, 오지은 옮김/세미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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